황후가 되었다. 그리고 무능한 남편 대신 조정 구석구석 황후 가남풍의 권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혜제는 그저 도구에 불과했다. 혜제는 가남풍에게 그렇게 이용을 당하고도 국사를 도와주는 좋은 황후를 두었다며 흐뭇하게 여겼다. 반대파를 숙청하는 과정에서 가남풍이 남다른 기백을 보여준
桑麻無恙, ?犬不驚, 村夫野老 野老 [y?l?o]:1) 시골에 사는 늙은이 2) 거칠고 촌스러우며 예의를 모르는 노인 3) 노인 자신의 겸칭
, 散坐瓜棚 棚(시렁, 선반 붕; ?-총12획; pe?ng,pe?ng)
豆架旁, 笑談大唐遺事 ?事 [y?sh?]:1) 죽은 사람이 남긴 事跡 2) 전해 내려오는 사적
, 什?晉陽宮 이연에게 거병(擧兵)을 촉구
시호로서, 악한 군주라는 의미이다. 양제는 그 제위에 오르는 상황이 도덕적 지탄을 받고 있다. 그것은 철저한 이중생활로 독고황후를 속여 형을 폐태자 시키고 아버지의 후비였던 선화부인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더욱이 그러한 시호를 붙인 이유는 과도한 부역의 부과를 주로 들고 있는데
독고(文獻獨孤)황후이다. 처음에 진왕(晉王)이 되어 남조(南朝)시대 진(陳)나라 토벌에 활동하였으며, 600년에 형인 황태자 용(勇)을 실각시키고 스스로 황태자가 되었다. 권신 양소(楊素)와 결탁하여 황제 자리에 앉았는데, 그때 아버지 문제를 살해하고 그의 왕비를 범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즉위 뒤
독고신은 당시 8주국대장군의 한 사람이고 그의 딸들은 양견의 처 이외에도, 周 明帝의 황후와 또 한 사람은 주국대장군 李虎의 아들의 처이고 唐 高祖 李淵의 모친이다. 또 양견의 딸도 주 명제의 황후가 되었다. 그러므로 양견은 누대에 걸쳐 북조에서 고관을 하였음으로 자연히 호화된 한인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