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밀부사를 사퇴하고, 1070년에 지방으로 나갔다. 당시 그는 편년체의 역사 《자치통감》을 쓰고 있었다. 신종도 그 책의 완성을 크게 기대하여 편집의 편의를 제공, 그의 뜻대로 뤄양에 거주하며 편집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돌봐주는 등 원조를 아끼지 않았으며, 1084년 마침내 전 20권의 《자치통감》을 완
추밀부사, 참지정사, 형부상서, 병부상서 등의 요직을 거쳤다. 그러나 왕안석의 신법에 반대해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은퇴 다음해에 은둔 생활을 하다가 영주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66세의 나이로 천명을 다했고 2년 뒤 조정에서 문충(文忠) 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이 시호는 그가 일생동
추밀부사(樞密副使)가 되고, 이어서 참지정사(參知政事: 부재상)가 되어 그 유명한 경력신정(慶歷新政)을 단행했으나 다시 반대파의 저항에 막혀서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결국 이후에 중앙으로 복귀하지 못하고 지방관으로 생을 마쳤다. 그러나 그는 문무를 겸비한 명관으로 현재에도 중국 공산당 간부
추밀부사(樞密副使)로 승진했고 그다음 해에는 부재상(副宰相)에 해당하는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다. 그러나 궁중에서 더 이상 자리를 보전하기 어려운 사태가 발생하여 60세에 그의 관운(官運)은 끝이 났다. 그는 며느리와 불륜관계를 맺었다는 누명을 쓰게 되었고 그로 인해 명성에 타격을 받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