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공방 미술가들의 작품에도 보이는 기하학적이고 극도로 단순한 형태도 포함하고 있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아르누보라 불리는 양식을 받아들인 미술가들이 미술공예운동의 일원으로 간주되었다. 동부와 북부 유럽의 많은 국가에서는 아르누보 계열의 장인들과 디자이너들이 국제양식을 수용하면
빈과 글래스고의 직선적인 기하학성을 ‘아르누보’라는 단일한 호칭으로 묶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아르누보가 유럽 전역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은 이 새로운 미술이 결코 어느 한 건축가나 화가, 디자이너 또는 어느 한 유파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라, 각자가 나름대로 역사주의를
빈에서 3월 혁명이 일어나 메테르니히가 실각
같은 시기에 베를린에서도 혁명이 일어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4세가 새로운 내각구성과 혁신적 입법의 실시 및 언론의 자유 등을 약속
→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을 겪으면서 변혁에 대해 환멸, 격동하는 정치정세와 사회적 투쟁에서 외면하고,
그리고 중국 등으로 진출하였으나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열강의 세계분할에 대한 참여였을 뿐 열강의 어느 특정 세력권이나 이권에 대한 도전은 아니었다. 그러나 독일은 1900년경 열강의 세계분할이 거의 완료되었을 때까지 기존 세력권이나 이권을 무시하면서 강력하게 세계정책을 추진했다.
I. 아들러의 생애
아들러(Adler)는 1870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출생하여 1937년 스코틀랜드 에버딘(Aberdeen)에서 사망하였다. 밑으로 네 명의 동생이 있기는 했지만, 질투심 많은 큰 형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였고, 2세 때 동생이 태어나면서 응석받이의 역할을 빼앗기는 경험을 하는 등 어린 시절을 스스로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