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419의거)의 개념
4.19혁명은 12년 동안 누적되었던 이승만 독재정권의 부패정치를 청산하고 이 땅에 정의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순수한 학생들의 청교도적 정신이 내재해 있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즉 이 혁명은 장기집권을 위해 불의와 불법을 자행하던 이승만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정신의
45년 10월 5일 소작료A378;3:1A379;제를 공포하여 고율소작료 상한을 제한했으나, 이는 악명 높은 지주적 토지소유제를 완전히 해체한 것이 아닌 점에서 아직 미봉적인 정책이었다. 이후 전국농민조합총연맹에서 토지개혁문제를 최초로 제기했으며 농민의 이에 대한 열망은 높았다. 토지개혁은 해방 직
19혁명
해방이후 우리의 역사는 민족사의 정통(正統)으로 되어야 할 반일(反日)․반제(反帝)의 주체인 민중, 대다수 민족구성원을 민족해방이 귀결한 성과에의 참여에서 배제함으로써 민중소외를 더욱 확대․심화시키는 것으로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해방 후 민족구성원 내부에서 민족국가의
무차별 총격을 가하였다. 이승만은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시위를 진압하고자 했다. 부산, 광주, 청주, 인천, 대구 등지에서도 수많은 민중이 시위에 참가하여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독재정권에 항거하였다. 이날 전국 각지에서 경찰의 총격으로 희생자 수는 사망 183명 부상 6200여명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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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부산, 마산지역의 시민봉기가 일어났다. 1979년 9월 4일 경북대, 계명대, 영남대의 '사회정의 구현을 위한 경북학생협의회'가 '이 어두운 역사의 조타수가 되지 못한다면'이라는 제목의 선언서를 발표했고(같은 책: 324-5) 10월 15일에는 '부산대학교 민주학생 일동'의 이름으로 '노예의 길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