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의 열린 미래를 담보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미래의 전망에 대한 시사점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광주항쟁의 의의를 다시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광주항쟁에 대한 기존의 논의에서 이 광주봉기가 갖는 역사적 의의는 다양하게 제시되어 왔다. 이는 인간 존엄성과 사회정의의 수호, 군부독재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려는 노력이었다(손호철 1995 ; 안종철 1997).
둘째, “발생원인에 대한 연구: 왜 5.18이 일어났는가?”에 집중되어있다. 이들의 논의에는 사회운동 및 정치적 담론의 영향이 강하게 미치고 있었다. 당시의 과학적 논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아무
광주민중항쟁은 많은 한계 속에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전략적으로 볼 때 실패로 끝났지만 이후 민주화세력, 그리고 학생, 노동자 계층의 반성을 야기하였다. 끝까지, 그리고 죽을 때까지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위해서 투행하는 광주의 민중을 바라보면서 당시까지 낭만주의적이고 소시민적이었던 운동
1) 쟁점의 발굴 과정
광주민주화 항쟁(이하 광주)라는 것을 접하게 되었을 때, 우리 조 조원 개개인이 지니고 있었던 개념은 단순히 엄숙함 아니면, 막연한 신비감이었다. 광주에 대해서 우리는 어떠한 이미지만 가지고 있었지 그에 대한 실증적인 이론적인 깊이는 지니고 있지 못했다. 토론의 요
광주시에서도 역시 비상계엄군이 각 대학을 장악하고 학생들의 등교를 저지하였다. 이에 울분한 전남대학교 학생과 비상계엄군 간에 충돌이 일어났다. 계엄군에게 구타를 당한 학생이 속출하자, '계엄철폐' '휴교령철폐'를 외치며 중심 대로인 금남로로 진출하였다(80. 5. 18).
계엄군과 공수부대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