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구되던 사항들을 부분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다져가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시기는 당시 모순과 위기에 처해있던 독점자본이 다시 자본을 축적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6.29 선언의 시대를 지나 현재에 이르러 5.18특별법이 제정되는 등 새로운 시대는 반성을 향해 나아간다.
광주 학생, 시민의 민주화를 위한 노력’
→군부의 과잉 진압을 인정하지만
광주 시민도 정당하고 군부도
정당하다는 논리?!
2) 자유주의적 관점 : ‘광주 의거’ 또는 ‘광주 시민 항쟁’
5.17 군사 쿠데타 조치에 대한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공수부대의 살상행위에 대한
정책이 농업의 희생을 기반으로 하였기 때문에 전라도 지역의 불균등 발전은 심각한 것이었다.
1971년 선거 이후 박정권의 호남지역에 대한 정치적 견제가 계속되었는데, 호남지역에서는 이러한 억압적 정치구조에 대한 저항의식이 다른 어느 지역에서보다 성장하였다는 점도 주목할 대목이다.
대한 의원들의 신문이 이어졌다.
당시 광주 상황이 긴박해졌음에도 2군사령부는 20일 밤 10시30분, 발포 금지와 실탄 통제를 지시한 상태였다. 하지만 공수부대는 이를 어기고 실탄을 분배해 발포했다. 이 집단 발포 뒤 7시간 반이 지난 21일 저녁 8시30분, 계엄사는 비로소 전남·북 계엄분소에 자위권 발
부대이동을 시작해 이날 계염확대와 동시에 부대투입을 개시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⑶ 어째서 광주인가?
광주민중항쟁은 5·17조처에도 아랑곳없이 민주화를 위한 외침을 수그러뜨리지 않았던 광주지역의 대학생들과 시위 초기부터 나타난 진압군의 과잉진압으로 인해 사태가 험악하게 진행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