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를 건설하고 개혁하겠다는 정치성향이 강했다. 일제에 의한 중국 대륙 침략에 있어서 첨병으로 뽑혔다는 점이 그들로 하여금 권력과 총구의 함수관계와 개혁과 군대의 역할에 대하여 눈을 뜨게 만들었으며 현실을 직시하도록 했다. 국가건설과 사회개혁에 대한 열정은 같았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
단절, 농어촌 고리채의 정리, 부실 기업 및 사학의 정비 등 사회 모순과 구악을 과감히 제거하였으며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여 경제 자립을 꾀하였다. 그들이 국가 주도의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기도 하나 군사문화의 사회확산, 군의 탈법적 정치 개입의 선례를 남겼으며
재건 등을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켜서 제2공화국 장면 내각을 붕괴시켰다.
5월 16일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하고 장도영이 의장에 자신은 부의장에 취임하였다. 5월 20일 장도영이 내각수반이 되면서 박정희는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에 취임하여 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한다.
집권
군사문화가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Ⅱ. 본 론
1. 군부독재의 형성과 전개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부 세력은 사회의 혼란을 구실로 군사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1961. 5. 16.). 이를 5ㆍ16군사정변이라 한다. 군부 세력은 헌정을 중단시키고 국가재건최고회의를 구성하여 군정
정치가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는 민주주의와 인권, 공적인 대의를 위해 헌신한 사람을 가장 심하게 탄압하였다. 이 한 가지 점만 주목하더라도 그는 국민적 지도자로서는 물론 민족적 지도자 혹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도 인정받을 수 있는 인간으로 평가받기는 어렵다.
김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