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론 - 김해경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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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상론 - 김해경에 대하여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이상(李箱) 김해경론
1. 생애 및 작품의 경향 김봉군(1997), 「한국현대작가론」, 민지사
이상(李霜)의 본명은 김해경(金海卿)으로 1910년 8월 20일 서울에서 아버지 김연창과 어머니 박세창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경제적 궁핍 때문에 3세 때부터 백부 김연필의 양자로 들어간다. 이는 백부의 해경에 대한 편애 때문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의 백부는 한학(漢學)을 공부한 사람으로 유교 윤리를 중시했으며, 유년시절 이상은 백부의 가르침으로 한문을 공부한다. 이러한 권위적인 백부와 무책임한 친부모 사이에서 이상은 심리적 갈등이 심했으며, 이러한 체험이 그의 문학 속에서 불안 의식으로 나타나게 된다. 또한, 백부가 물심양면으로 그에 대해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것에 반해 백모는 이상에게 굉장히 냉대를 하였다. 이렇게 자신에게 우호적인 환경과 적대적인 환경을 동시에 겪으면서 그는 실부와의 생이별이라는 분리경험의 정신적 외상과 더불어 극단적인 이중적 감정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상황적 요소들로 인해 그의 작품에서 이중적 성향이 심화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는 보성고보 시절부터 미술에 소질이 있었는데, 교내 미술 전람회에서 유화 ‘풍경’이 당선되기도 하였다. 이 때 교내에서 여러 그림 활동을 하다가 서서히 언어에도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그가 시를 쓰게 됨은 보성고보 시절에 만난 이헌구, 임화, 김기림의 영향도 적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26년 보성 고보를 졸업하였고, 경성 고등 공업학교에 입학하여 학업에 전념하며 미술 수업에도 힘을 기울였다. 1929년 경성고공을 졸업한 그는 곧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技手)로 취직했다가, 회계과로 옮기기도 했다.
이상의 최초 문학 발표작은 1920년 잡지 에 연재한 중편 소설 「십이월 십이일」이다. 이 작품에 이어, 그는 1931년 에 「이상한 가역반응」외 「파편의 경치」 등의 5편의 최초의 시작(詩作)을 발표한다. 또한 이 해 그가 그린 양화 ‘자화상’이 출품 입선되기도 한 것으로 보아, 그가 시와 그림 양쪽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명백히 알 수 있다.
그는 1930년대 초부터 초현실주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영향을 받아, 무의식의 세계 내지는 꿈의 세계의 표현을 지향하는 20세기의 문학, 예술사조이다. 초현실주의는 1916년 루마니아 시인인 차라(Tristan Tzara)의 주동으로 일어난 다다이즘에서 싹이 텄다. 즉 어법의 무시, 의미와 논리성의 거부 등 모든 전통적 가치와 모럴(도덕률)의 기성 사회 질서를 철저히 파괴하고자 하다가, 마침내 시 자체까지도 부정하게 되어 소멸하게 되고 만 다다이즘의 다음 단계에 위치하는 사조이다.
계열의 시를 발표하였으며, 주로 의식 세계의 심층을 탐구하는 작품을 많이 창작 했다. 1932년 단편 「지도의 암실」, 시 「건축무한육면각체」 등 난해한 작품을 ‘이상’ 이상이라는 이름은 그가 일하던 건축 공사장에서 인부들이 ‘긴상’을 ‘이상’으로 잘못 부른데서 이상이라 자칭했다고 한다.
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발표하였고 백부가 사망하면서 유산을 정리하여 가족과 함께 살게 되는 경제적 여유와 정신적 자유를 얻었으나, 이 해에 1차 각혈(血)을 하고 이듬해 각혈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자 건축기사 일을 그만두게 되는 불우한 일도 있었다.
그는 백천 온천에 요양을 갔다가 기생 금홍과 사랑에 빠져 서울로 올라와 다방 ‘제비’를 운영하였고, 동거하면서 시 「꽃나무」, 「거울」 등을 발표하였다. 이 무렵 박태원과 알게 되고 문단의 이태준, 김기림, 정지용 같은 중견들과 교우가 시작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詩作)에 접어들었다. 1934년에는 ‘구인회’에 입회하고 조선 중앙일보에 시 「오감도」를 연재, 발표한다. 하지만 그의 실험적기법과 난해함의 극치를 달리는 작품들에 대해 ‘무슨 미친놈의 잠꼬대냐’, ‘무슨 개수작이냐’ 등 독자들의 비판과 항의가 빗발쳐 애초에 예정되어 있던 30회 연재가 15회로 줄어들었고, 그는 깊은 좌절을 한다. 1935년 잇따른 다방, 카페의 경영 실패와 애정 파탄으로 실의에 빠진다. 그러다가 1936년 그는 문인 변동림과 신흥사에서 간단한 결혼식을 올렸고, 이 해에 시 「지비1·2·3」, 「이단」, 「명경」, 「위독」 등외에 단편 「지주회시」, 「날개」, 「종생기」, 「봉별기」 등 다수의 작품을 발표하며 삶의 전환을 시도한다. 그러나 결혼 후에도 이상의 생활은 지병과 가난을 면치 못했고, 최후의 탈출구로서 도쿄 행을 시도하나 그것도 여의치 못한다.
결국 1937년 건강이 극도로 안 좋아져 굶주림과 폐병, 정신쇠약에 시달리다가 사상불온자로 오인되어 경찰에 구속되었다. 병마 악화로 한 달여 만에 석방되어 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부인 변동림과 마지막 해후를 하고, 1937년 4월 17일 “메론 향기가 맡고 싶소.”라는 유언을 남기고 28세의 어린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 후 그의 유골은 같은 해 5월 4일 고국에 돌아와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2. 문학적 특성
1) 현실에 대한 불안 의식(죽음 의식) 정지연(2009), “모더니즘시에 나타난 죽음의식”, 계명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p.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