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과 노동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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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과 노동운동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가 육사 58기생, 해병대와 함께 ‘무능한 장면 정권 때문에 생긴 사회 혼란과 정치 불안’을 구실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포병5개 대대가 먼저 서울에 들어와 육군 본부를 점령하고 주요관서를 장악한 뒤, 쿠데타 세력은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사혁명위원회(의장 장도영, 부의장 박정희)를 구성했다. 쿠데타가 일어나자 장면정권은 저항도 하지 않고 내각 총사퇴를 결정했고, 이는 쿠데타 성공의 요인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516 쿠데타부터 박정희가 대통령에 취임하는 1963년 1월까지 군정기 동안 군부세력은 자신들의 정치기반을 굳건히 하려는 조치를 펴나간다. 입법 사법 행정 3권을 모두 장악하고 반혁명 분자의 색출과 제거에 주력하였으며, 군정은 민주주의 절차를 무시하며 어떠한 비판을 용납하지 않은 채 신문과 잡지를 폐간시켰다. 또한, 내부권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군부터 정비했다. 이어 기성 정치인이 활동하지 못하게 했고, 학술종교단체 등을 뺀 정당 사회단체 활동을 금지시켰다. 군정의 상부기관인 중앙정보부는 일련의 터닦기 사업에 앞정서며 농어촌 고리채 탕감과 농산물 가격 안정정책을 실시하는데, 전자는 농협에서 농업자금을 공급해야 할 뒤이은 조치가 없어 실패하였고, 후자는 수출주도형 경제전략에 밀려 저곡가 정책으로 이용되었다.
이 중앙정보부는 언론인, 교수, 관리들을 끌어들여 민주공화당을 아주 비밀스럽게 조직했다. 공화당 창당과 활동에 드는 많은 자금을 마련하려고 ‘새나라 자동차 사건’, ‘빠찡꼬 사건’, ‘증권파동’, ‘워커힐 사건’의 4대 의혹사건과 삼분폭리 사건을 일으켰다. 이어 박정희는 대통령 출마를 위해 “민정이양 뒤 군에 복귀하겠다”고 국민과 한 약속을 교묘히 구실을 만들어 어기고 1963년 4월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윤보선을 이기고 당선된다. 뒤이은 제6대 국회의원선거에서 공화당은 압도적으로 승리하며, 그저 ‘군복을 양복으로 갈아입은’ 군정의 연속을 이어간다.
2) 유신체제
1967년 5월 11일 제6대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는 다시 당선되었다. 박정희는 대통령 3기 연임을 허용하는 3선개헌의 뜻을 내비추며 장기집권을 추진하기 시작한다. 여당은 1969년 9월 14일 새벽 2시, 국회 제3별관에서 3선 개헌안을 10분만에 날치기 통과 시켰다. 3선 개헌안은 10월 17일 국민투표에 부쳐져 65.1%의 찬성으로 통과되었고, 박정권은 고도성장을 간판 삼아 1인 통치체제로 굳혀갔다. 1971년 제 7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한 박정희는 중단없는 경제 건설을 내세우며 김대중을 힘겹게 누르고 당선되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박정권에게 남북화해를 종용하며 평화적인 통일방안을 잇달았다. 민중들 사이에 통일의 기대감은 커졌고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을 없애야 한다는 요구도 높아졌다. 이에 박정권의 기반에 위협으로 다가왔다. 바깥사정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야당은 박정권을 더욱 비판했으며. 억눌려 왔던 노동자, 도시빈민, 중간층의 저항도 차츰 불거졌다.
나라안팎으로 위기에 몰린 박정권은 이에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11월 21일 비상계엄 아래 국민투표에 부쳐졌고 유신헌법을 찬성하는 말만 하게 하여 찬성 91.5%로 통과되었다. 박정권은 유신체제가 나라 안팎의 혼란을 극복하고 경제성장을 이끌 지도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며, 서구의 자유민주주의는 우리나라에 맞지 않으므로 우리 실정에 맞는 ‘한국적 민주주의’를 해야 한다며 정당화시켰다.
유신헌법은 대통령 임기를 4년에서 6년으로 늘리고 중임 제한 규정을 없애 영구 집권할 수 있게 했으며 간접선거로 치러졌다. 1972년 12월 23일 혼자 입후보한 박정희를 제 8대 대통령으로 뽑았다. 12월 27일 유신헌법이 공포되고 박정희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제4공화국이 시작되었다. 대통령은 국회의원1/3에 해당하는 임기 3년의 유신정우회(유정회)의원을 추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국회의원선거제도는 소선거구제에서 2인을 뽑는 중선거구제로 바뀌어 공화당이 민심을 잃은 지역에서도 국회의원을 당선시킬 수 있게 만들었다. 또 대법관을 대통령이 임명함으로써 사법부를 행정부에 종속시켰다.
유신체제는 긴급조치시대라고 부를 만큼 억압을 통해서만 유지되었다. 또한 물리적 탄압 뿐만이 아니라 반공 안보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국민동원 체제를 세워 통제를 강화했다.
1978년 9대 대통령선거에서 1표만 무효처리된 채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1978년 12월 12일 10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신민당이 득표율에서 처음으로 공화당을 이기면서 유신체제의 몰락을 예고했다. 이어 1979년 8월 YH무역 노동자들이 대규모 시위가 확산되면서 민중 세력의 대립이 날카로워졌고, 정면대결을 1979년 10월 부산에서 시작되어 10월18일 마산으로 번져 이루어 졌다.(부마항쟁) 이 시위는 학생들 시위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시민들과 노동자들이 동참하면서 민중항쟁이었으며 유신체제가 몰락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를 시해하자 마침내 유신체제는 무너졌다.
박정희의 죽음은 권력 갈등의 결과였고 유신체제의 몰락은 민중세력이 치열하게 싸워 얻은 직접적인 성과가 아니었기 때문에 지배층과 민중 사이의 대립은 1980년 광주민중항쟁으로 터져 나오게 된다.
3. 박정희 정권의 경제적 상황
참고문헌
참고문헌
한국현대사3 - 196070년대 한국사회와 변혁운동(한국역사연구회 현대사연구반)-풀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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