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원형 활용방안 삼별초 문화원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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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문화원형 활용방안 삼별초 문화원형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삼별초에 대한 역사적 시각은 다양하다. 이제껏 접하지 못했던 흥미로운 시각이 있다. 바로 삼별초는 해상왕국을 꿈꾸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제껏 들어보지도 못했던 많은 인물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 또한 흥미롭다. ‘단 한 줄의 역사기술이 문화상품을 만든다.’라는 말이 있듯 문화가 자산인 시대이다. 삼별초 문화원형에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담고 있다. 단 한 줄의 여사기록이 창작되어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있다. 삼별초도 그러할 것이다. 삼별초에 숨겨진 많은 이야기, 인물, 구비전승 등의 소재는 영화, 드라마,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캐릭터 등의 창작소재로 활용되기에 충분하다. 무기, 방어체계, 군대 등은 게임 등에 등용이 가능하다.
삼별초에 관한 기록
삼별초(三別抄)에 관해서는 다음의 자료가 가장 구체적인 기록이다.
“최우(崔瑀)는 나라에 도(盜)가 많음을 근심하여 용사(勇士)를 모아서 매일 밤 돌아다니며 횡포를 막게 하고, 이로 인하여 야별초(夜別抄)라고 이름 붙이었는데, 도(盜)가 각 도(道)에 일어남에 별초(別抄)를 나누어 보내서 이를 잡게 하였다. 그 군사가 심히 많아 드디어 나누어서 좌우별초(左右別抄)로 삼았다. 또 국인(國人)으로 몽골로부터 도망쳐 온 자로 일부를 삼아 신의군(神義軍)이라고 이름 하였다. 이것이 삼별초(三別抄)다. 권신(權臣)이 집권하자 이로써 앞잡이를 삼아, 그 봉록(俸祿)을 후하게 하고 혹은 사사로운 은혜를 베풀고 또 죄인의 재물을 적몰하여 이에 주었기 때문에 권신이 마음대로 부리었고 그들은 앞을 다투어 힘을 다하였다. 김준(金俊)이 최우를 죽이고, 임연(林衍)이 김준을 죽이고, 송송례가 임유무를 죽임에 모두 그 힘을 빌리었다. 왕이 구경(舊京)을 다시 서울로 함에 미쳐 삼별초가 반(叛)하여 이심(異心)을 품었기 때문에 이를 혁파(革罷)하였다.( 81)”
이는 삼별초의 성립에서부터 삼별초를 폐하게 될 때까지의 사정을 설명해 준다. 나라 안의 도(盜)를 잡기 위해 최우가 조직한 야별초가 삼별초의 모체가 되었으며, 신의군이 더해져 삼별초가 되었다는 것이다.
삼별초의 기능과 성격
-삼별초의 기능
최충헌(崔忠獻)에 의해 조직된 도방(都房)은 개인의 신변호위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국가의 군인으로 하여금 개인의 신변호위만을 전담케 함으로써 야기(惹起)될 수 있는 비난을 모면하기 위해 공적(公的)인 임무를 표방한 야별초(夜別抄)를 조직했을 가능성은 있어 보인다. 삼별초는 국가의 군인이었다. 제주에 웅거한 삼별초와의 항전에서 전사한 장군에 대한 포상에 덧붙여 삼별초로부터 귀순한 군인에게 전정(田丁)을 다시 지급한다는 내용의 기록은 삼별초가 중앙군의 일부였음을 알려준다.
-삼별초의 지휘관
삼별초의 지휘관을 나타내는 기록으로는 야별초지유(夜別抄指諭) 또는 신의군도령(神義軍都領)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는데 그들의 계급은 별장(別將), 낭장(郞將), 중랑장(中郞將)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