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 한성백제박물관 답사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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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기행문 한성백제박물관 답사 후기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오늘은 청소년문화해설사 2번째 날이다. 우리는 모두 한성백제박물관에 가서 문화해설사의 자질과 백제의 문화에 대해 배우게 되었다. 먼저 한성백제박물관 입구에 들어서면 큰 지도를 볼 수 있다. 그 지도는 지금부터 이천년을 꿰뚫는 역사를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는 뜻이다. 거기서 문화해설사님께서 한성 백제 유적발굴의 계기를 설명해주셨다. 풍납토성이 백제 수도였는데 사람들이 한성 백제 왕궁에 관심을 가지게 된지 10년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비록 풍납토성을 문화재로 지정해 출입을 금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예전에는 풍납토성 성벽만 지정했다. 그래서 그전에 아파트 짓고, 사람들이 살면서 많이 훼손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풍납토성위에는 현대적인 모습도 많이 나타난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열심히 발굴하여 보존처리를 하고 있다니 다행이다. 그 다음은 성벽을 보았는데, 전사법을 이용하여 진짜 풍납토성 흙을 성벽모형에 붙였다고 한다. 풍납토성의 모형을 보니 판축법으로 지은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토성임에도 불구하고 안무너질 수 있던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토성이 제일 약한 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석성같은 성보다 오히려 토성이 제일 단단하다. 왜냐하면 토성은 한곳이 뚫려도 매꾸면 그만이지만, 석성같은 경우는 한곳이 뚫리면 위아래가 다 불안정하다. 또한 풍납토성의 또 다른 특징은 동북아시아에서 제일 큰 토성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강한 백제의 왕권을 상징했으면 백제가 얼마나 발달한 나라였는지 보여주는 실례가 될 것이다. 그럼 지금 2000년이 지나도록 한성 유적지를 찾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성은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인하여 점령당했다. 그 때 장수왕은 한성안의 모든 것들을 불태워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개로왕의 아들 문주는 웅진으로 천도했다. 고구려군이 계속 아성에 있기 때문에 백제는 한성을 재건할 시간과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그 뒤로 한성은 아예 잊혀졌다가 1926년 대홍수 때 발견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