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능 엔터테이너 세종대왕 발자취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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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만능 엔터테이너 세종대왕 발자취를 찾아서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최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는 시시각각 정보가 범람하는 정보사회이다. 따라서 정보 획득이 매우 필수적인 사회이며, 이에 도태되었을 때는 사회에 적응하기가 매우 힘들 정도로 정보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갈수록 빨라지는 교통수단과 통신수단은 이러한 상황에 한몫했다고 볼 수 있다. 새로운 기술로 인해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바로 신제품이 나오는 전자시장에서는 그 속도가 해가 지날수록 빨라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휴대폰을 바라보게 되었다. 문자를 쓰는 나의 손돌림은 매우 빨라 한 글을 써서 보내는데 몇 초가 걸리지 않았다. 정보를 손쉽게 보내고 받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보기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하루에도 많은 사건이 일어나고 그 정보들을 알고 뒤떨어지지 않으려면 매우 필수적이다. 갑자기 교수님이 수업시간에 말씀하셨던 한글의 위대성이 생각났다. 만일 한글이 아니고 다른 언어였으면 정보를 보내고 받는데 얼마나 힘들었을까? 가까운 나라 중국만 해도 수 만가지 글자로 된 언어로 글자를 문자나 E-mail로 주고받기 힘들다. 따라서 한글 창제에 깊은 감사를 드리고 한글의 위대성에 대해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다른 언어와는 달리 한글은 매우 쉽고 간편하며 많은 사람들이 익혀 널리 쓰일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물론 사라진 몇 글자가 있지만,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데 매우 유익하며 손쉽게 쓰인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모두 알고 있다시피 한글은 훈민정음이 쉽게 쓸 수 있게 다듬어진 언어로 세종대왕께서 백성들이 글을 못 읽는 것을 불쌍히 여겨 집현전을 설치해 많은 학자들과 의논하여 창제하기에 이르렀다. 위대한 업적을 남겼으며 문화, 경제, 경영, 법률, 민생 등 어느 하나 빠질 것 없이 국가를 경영하신 세종대왕을 여러 방면에서 알아보자.
과학을 통해 바라본 세종의 정치
내가 재학하고 있는 비즈니스 IT학부는 정보 관리학의 모태로 경영정보전공과 정보프로그래밍전공의 혼합으로 경영학의 기본적인 것을 정보학인 컴퓨터와 통신 분야에 접목시켜 기업경영을 극대화 시키는 학문을 배운다. 따라서 세종의 다양한 경영기법은 나에게 많은 점을 시사하였다. 먼저 과학적인 부분에서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최초로 만들어낸 게 많은 시점이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세종의 탁월한 인재발탁과 더불어 장영실과 이천의 팀웍을 형성을 만드는 탁월한 리더십이 뒷받침 되었기에 이뤄냈던 것이었다.
다음은 세종이 장영실의 업적에 대한 적당한 포상을 적당히 함으로써 보다 나은 발명품들과 장영실과 세종이 관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안숭선에게 명하여 장영실에게 호군의 관직을 더해 줄 것을 의논하게 하다
안숭선에게 명하여 영의정 황희와 좌의정 맹사성에게 의논하기를,
“행 사직(行司直) 장영실(蔣英實)은 그 아비가 본대 원(元) 나라의 소·항주(蘇杭州) 사람이고, 어미는 기생이었는데, 공교(工巧)한 솜씨가 보통 사람에 뛰어나므로 태종께서 보호하시었고, 나도 역시 이를 아낀다. 임인·계묘년 무렵에 상의원(尙衣院) 별좌(別坐)를 시키고자 하여 이조 판서 허조와 병조 판서 조말생에게 의논하였더니, 허조는, ‘기생의 소생을 상의원에 임용할 수 없다.’고 하고, 말생은 ‘이런 무리는 상의원에 더욱 적합하다.’고 하여, 두 의논이 일치되지 아니하므로, 내가 굳이 하지 못하였다가 그 뒤에 다시 대신들에게 의논한즉, 유정현(柳廷顯) 등이 ‘상의원에 임명할 수 있다.’고 하기에, 내가 그대로 따라서 별좌에 임명하였었다. 영실의 사람됨이 비단 공교한 솜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질이 똑똑하기가 보통에 뛰어나서, 매양 강무할 때에는 나의 곁에 가까이 모시어서 내시를 대신하여 명령을 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찌 이것을 공이라고 하겠는가. 이제 자격궁루(自擊宮漏)를 만들었는데 비록 나의 가르침을 받아서 하였지마는, 만약 이 사람이 아니더라면 암만해도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들으니 원나라 순제(順帝) 때에 저절로 치는 물시계가 있었다 하나, 그러나 만듦새의 정교함이 아마도 영실의 정밀함에는 미치지 못하였을 것이다. 만대에 이어 전할 기물을 능히 만들었으니 그 공이 작지 아니하므로 호군(護軍)의 관직을 더해 주고자 한다.” 하니, 희 등이 아뢰기를, “김인(金忍)은 평양의 관노였사오나 날래고 용맹함이 보통 사람에 뛰어나므로 태종께서 호군을 특별히 제수하시었고, 그것만이 특례가 아니오라, 이 같은 무리들로 호군 이상의 관직을 받는 자가 매우 많사온데, 유독 영실에게만 어찌 불가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 사건은 세종 15년 9월 16일에 일어 난 것으로 장영실을 지극히 높이 평가하여 더 높은 관직을 주려고 하는 상황이다. 자신의 임무를 다 수행하였을 때는 그에 맞는 포상을 함으로써 대접하는 경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 장영실은 누구인가?
장영실은 조선 전기 세종 때의 과학자이다. 한국 최초의 물시계인 보루각의 자격루를 만들었으며, 세계 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와 수표를 발명하여 하천의 범람을 미리 알 수 있게 했다. 그 외 여러 과학적 도구를 제작 완성하였다. 본관 아산(牙山). 기녀 소생으로 동래현(東萊縣)의 관노(官奴) 출신. 과학적 재능이 있어 제련(製鍊) ·축성(築城) ·농기구 ·무기 등의 수리에 뛰어나서 1423년(세종 5) 왕의 특명으로 발탁, 상의원(尙衣院) 별좌가 되면서 노예의 신분을 벗었다. 그 후 행사직(行司直)이 되고 1432년 중추원사 이천(李狀)을 도와 간의대(簡儀臺) 제작에 착수하고 각종 천문의(天文儀) 제작을 감독하였다. 1433년 호군(護軍)에 오르고 혼천의(渾天儀) 제작에 착수하여 1년 만에 완성하고 이듬해 동활자(銅活字)인 경자자(庚子字)의 결함을 보완한 금속활자 갑인자(甲寅字)의 주조를 지휘 감독 하였으며, 한국 최초의 물시계인 보루각(報漏閣)의 자격루(自擊漏)를 만들었다.
참고문헌
참고자료
세종의 국가경영 - 김영수
조선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