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만복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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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보물 만복사지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만복사지(萬福寺址)
남원 시내에서 순창으로 가는 왕정동 도로변에 큰 절터가 있다. 덕유산에서 뻗어 내린 교룡산의 줄기인 기린봉 기슭으로, 산자락이 절터를 나지막하게 감싸고 앞으로는 요천이 잔잔히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터다. 옛날에는 남원 시가지가 이곳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이 절로 돌아가는 승려가 남원팔경의 하나로 꼽힐 만큼 장관이었다고 한다. 바로 여기가 남원에서는 가장 큰절이었던 만복사(萬福寺, 사적 제349호)가 있던 곳이다. 이름 또한 대중적이어서 부처님께 정성으로 기원하면 누구나 복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남원도호부」 기록에 의하면 고려 문종 재위 때(1046~1083) 창건하였다고 하며, 동쪽에 오층전(五層殿)이 있고 서쪽에 이층전(二層殿)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어 동쪽에 목탑, 서쪽에 금당이 있는 서전동탑(西殿東塔)의 가람임을 알 수 있다. 이곳에는 대웅전(大雄殿)외에도 약사전(藥師殿)천불전(千佛殿)영산전(靈山殿)보응전(普應殿)나한전(羅漢殿)명부전(冥府殿)종각(鐘閣)등이 있었다고 하며, 승려도 수백을 헤아려 「만복사 귀승(萬福寺 歸僧)」이 남원팔경(南原八景)중의 하나라고 하였다. 또한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오층전각에 10m가 넘는 불상이 안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정유재란 때인 선조 30년(1597) 왜구에 의해 불타버린 이래 숙종 4년(1678) 남원부사였던 정동설(鄭東卨)이 중창하려 했지만 규모가 워낙 커서 예전처럼 복원하지는 못하고 승방 1동을 지어 그 명맥을 유지해왔으나, 이후 300여 년 동안 돌보는 이가 없어 절터에 민가가 들어서는 등 폐사로 있다가 1979년부터 7년간 전북대 박물관 팀에 의해 발굴, 복원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만복사는 고려 초기에 창건된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창건 후 몇 차례 중창되면서 탑을 중심으로 동서북쪽에 각각 금당이 들어선 1탑 3금 당식의 독특한 가람배치를 이루었음을 확인했다. 현재 절터에는 여러 금당터와 보물로 지정된 오층석탑, 석불입상, 석대좌, 당간지주 등이 남아 화려했던 만복사의 옛 모습을 짐작하게 하고 있으며, 고려시대의 가람배치를 확인해 볼 수 있는 유일한 절터로 매우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만복사터에 들어서면서 처음 만나는 유물은 도로 위의 철책 속에 갇혀 있는 석인상이다. 한국인의 미소라고 격찬을 받고있는 이 석인상의 몸통은 땅속에 묻혀 있다. 석인상 아래쪽으로 내려서서 절터에 이르면 보물 제32호로 지정된 당간지주가 절터 맨 앞쪽에 서 있다. 당간지주 뒤쪽에는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추정되는 중문(中門)터가 있으나, 토층 조사 결과 중문터는 창건 당시의 건물은 아님이 밝혀졌다.
중문터 뒤에는 창건 당시의 동쪽 5층 전각, 곧 목탑터가 있다. 남북변에 각각 계단 일부가 남아 있는데 정면과 측면이 각각 5칸이며, 둥글게 다듬은 초석과 지대석기단석 등이 복원돼 있다. 중문터와 목탑터의 사이에는 네모난 지대석 위에 복엽 연화문을 양각한 하대석이 남은 석등이 자리잡고 있다. 상면 중앙에는 간주를 끼울 수 있는 구멍도 남아 있다.
목탑터 왼쪽의 석대좌(보물 제31호)가 있는 건물터가 창건 당시의 서쪽의 2층 전각, 곧 서금당터이다. 서금당터는 외둘레가 1칸이고, 정면 5칸 측면 4칸 정도의 규모이다. 남쪽에 계단의 일부도 남아 있다. 목탑터 뒤쪽에 있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건물터가 북금당터인데, 초석이 비교적 잘 남아 있고, 외둘레 1칸이 있으며, 남쪽과 북쪽에 계단터가 남아 있다. 목탑터와 북금당터 사이에는 복엽 연화문이 양각된 하대석만 남은 석등이 자리하고 있다. 하대석 상면 중심에 지름 30cm의 홈이 파였으며, 그 바깥으로 팔각 구획이 있어 간주를 받치도록 되어 있다. 목탑터의 오른쪽에서 뒤쪽으로 약간 물러선 곳에 자리잡은 동금당터는 파손이 심한 편이나 남아 있는 초석과 적심석 등에 의하면 정면 3칸 측면 3칸인 건물로 추정된다. 남쪽과 북쪽에 남아 있는 계단터가 희미하다. 북금당터와 동금당터는 출토된 기와조각으로 세조 9년(1463) 이후 세워진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금당터 뒤쪽에 오층석탑(보물 제30호)이 있으며, 동금당터와 오층석탑 사이에 석탑의 부재인 지붕돌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오층석탑 뒤쪽에는 석불입상(보물 제43호)이 있는 보호전각이 있고, 전각 오른쪽에 건물터 둘, 전각 뒤쪽에도 작은 건물터 하나가 복원돼 있다. 북금당터 뒤쪽에는 정면 7칸 측면 5칸의 강당터가 들어서 있다.
만복사터 부근에는백들‘썩은 밥배미’ ‘중상골’등 당시의 사찰 규모를 추정해 볼 수 있는 지명들이 남아 있다. ‘백들’은 만복사터 앞의 제방을 말하는데 승려들이 널어놓은 빨래로 제방 주변이 온통 하얗게 됐다고 해서 붙은 지명이며, ‘썩은 밥배미’는 절에서 나온 음식 찌꺼기를 처리하던 장소로 당시의 만복사에 있던 승려들이 엄청나게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복사지 석불입상(萬福寺址 石佛立像)
보물 제 43호
이 불상은 기록연대가 확실하기 때문에 불상의 시대적 특징을 잘 엿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조형 예술 면에서도 우수하여 11세기를 대표할만한 전형적인 작품이다. 불상의 두상 부분은 나발(螺髮)이 약화된 소발(素髮)이며, 육계가 복발형(覆鉢形)으로 높은 편이다. 상호(相好)는 타원형으로 턱은 이중으로 표현하였고, 목의 삼도(三道)는 넓게 처졌으나 형식적이다. 눈은 바로 뜨고 있으나, 눈썹을 치켜올려 이마는 좁고, 백호는 굵다. 코나 입은 원만한데다 입가를 들어가게 하여 자연스런 작풍(作風)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자연주의적 기법은 머리에서도 표현되고 있지만, 특히 선의 묘사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어깨에서 팔로 내려오는 곡선이나 삼도의습(衣褶)등이 거침없이 흘러내린 문양선 등은 부드럽고 우아한 느낌을 준다. 수인은 오른손을 가슴 높이로 들고 왼손은 팔을 내리고 있으며, 손목 부분만은 따로 끼우도록 되었으나 결실되어 구멍만이 남아 있다. 법의는 통견의(通肩衣)나, 양어깨를 가리고 뒤에 넘겨져 있으며, 앞가슴은 넓게 열려 있다. 의습은 삼도처럼 유연하게 호를 그리며 넓게 음각 되었다. 광배는 거신광(擧身光)으로 윗부분이 결실되었으나 선각이 뚜렷하다. 두광은 머리를 중심으로 복판연화문(複辦蓮花文)을 양각하였고, 외곽의 넓은 두광과 신광은 이중의 굵은 윤곽으로 양각하였다. 두광과 신광의 외연(外緣)에는 화염문(火焰文)을 새기고, 좌우상하에 두신광을 업은 화불(化佛)이 양각되었다. 두광과 신광 윤곽 안쪽에는 연지(蓮枝)를 정교하게 양각하고 있다. 현 높이 2.42m, 하부는 1m 이상 지하에 묻혀 있었으나 만복사지 발굴작업 때 좌대를 노출시켰다.
만복사지 당간지주(萬福寺址 幢竿支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