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무슨 말씀이 있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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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주께서 무슨 말씀이 있더냐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신 학 입 문
주께서 무슨 말씀이 계시더냐?
틸리히는 여기서의 주제인 ‘주님의 하신 말씀’이란 구절을 잘못 이해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마치 우리가 이성의 권위를 포함한 다른 모든 권위에 실패한 후에 하늘의 권위를 우러르는 것처럼 들린다고 하였습니다. 또 그것은 마치 우리가 섭리의 주에게 다만 한 순간만이라도 하나님이 개인적으로나 역사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마련하신 계획을 보여 달라고 간청하는 것 같이 들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반면, 그는 주님의 하신 말씀은 명백한 것이어서 여러 가지 다른 해석이나 반복되는 말씀이 없이도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최상의 지혜와 일치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주님의 하신 말씀이라는 구절에 현혹되지 말라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틸리히가 말하고자 하는 주님의 말씀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틸리히에게 귀를 기울여 봅시다.
【설교내용】
그것은 우리가 보통 살고 있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들려오는 음성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세계라고 부르는 사물과 사건들의 차원을 끊고 들어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 차원 안의 사물을 이전보다 더 훌륭히 처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떤 상황을 좌우하는 요인들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어떤 것을 덧붙여 주지 않으며 우리들의 결단에 대한 책임을 제거해 주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이런 것들과는 무엇인가 다른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 안에서 결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을 새로운 차원의 광명으로 높이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났던 이야기처럼,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주의 많은 말씀들은 정치적, 군사적 세력으로 대치시키는 만능의 지배자의 약속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건전한 판단으로 대치시키는, 전지한 교사에게서 전수된 교훈도 아닙니다. 그것들은 또한 영리한 인간의 조언으로 대치시키는 하늘의 상담자의 충고도 아닙니다. 그것들은 임시적인 관심과 통찰로 가득찬 우리들의 실존을 파헤치고 들어오는, 무엇인가 궁극적인 것의 표현입니다. 그것들은 우리들의 상황에다 무엇인가를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안에서 늘 살고 있는 차원에다가 하나의 차원을 더 첨가하는 것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말씀은 우리의 생활의 깊은 데서 들려 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을 때, 우리에게 말하여 주는 우리 자신의 상황의 깊이이기도 합니다. 어떤 중대한 결정 앞에서 들려오는 음성은 (예를 들어 올바른 직업의 선택이라든지 서로 결혼하기에 합당한 남녀를 가리켜 주는 신언(神言)은 아닙니다.) 우리 상황의 깊은 데서 나와서 우리의 구체적인 문제들을 궁극적인 시야로 높이는 한 음성입니다. 혹, 그 음성은 여러 가지 가능성들 사이의 균형에는 변화를 일으키지 않고, 과오와 실패와 죄책을 포함하여 결단에 따르는 모든 위기에도 불구하고 감히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용기를 우리에게 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 즉 우리 상황의 깊이에서 들려 오는 음성은 가능성의 불안에 종지부를 찍고, 여러 가지 요소의 문제성들을 내포한 채로의 현실을 긍정할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여러분에게 말씀을 주신 주는 여러분이 스스로 결단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주는 여러분에게 안전한 길을 마련해 주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의 결단에서 오류를 범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언제나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여러분의 과오는 옳은 것으로 바뀌어 질지도 모릅니다. 영원자의 앞에서 만일 여러분의 패배를 개의치 않는다면 여러분의 바로 그 패배를 통해서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와 닿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주로부터 오는 말씀을 받은 일도 없습니다" 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여러분은 그 소리를 못 들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분명히 여러분에게 말하여 졌습니다. 그것은 주로부터 오는 말씀은 언제나 있으며 또 끊임없이 들려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용모를 가진 누구에게나 지금도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그가 영원한 차원에서 오는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인류가 주님의 말씀을 전혀 받지 않았다는데 있지 않고, 받아 들였으나 그것에 저항하고 나아가 그것을 왜곡시켰다는데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교인들, 특별히 그리스도교 목사들은 우리가 주의 말씀을 들을 때 뿐 아니라 그것을 말할 때에도 역시 그것에 저항하고 그것을 왜곡시킨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주로부터 오는 말씀은 항상 존재하며, 또 그것은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회는 이 말씀의 중심적인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인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그의 존재 자체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그것을 전하여 온 교회와 모든 시대에 걸친 그의 종들은 그것을 율법과 전통, 습관과 인습의 문제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어떤 것으로 만들어서 그것을 따르려고 노력하여 왔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더 이상 우리의 일상 세계를 끊고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 일상적 세계의 한 부분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본문 성경에서 예레미야가 더불어 싸운 예언자들과 같이 말씀의 종, 목자들은 주님으로부터의 말씀을 갈구하기를 그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그 말씀을 그들의 소유물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어떤 소유물이 될 수 없으므로 그들이 말하는 이른바 말들은 주님으로부터의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설교자들의 입에서 왜곡되어 온 것과 같이 청취자들의 귀에서도 같은 모양으로 저항당해 왔습니다. 다시 말하며 우리들 전부에 의해서 왜곡되고 저항받아 온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인으로서 우리는 그것을 거절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호와께서 예언자들의 가슴속에 불어넣고, 성령이 제자들의 가슴 깊이 말하여 주던 그 음성을 이미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이전에 우리에게 일러진 말들을 듣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것들이 우리의 상황을 향하여 말하고 있고, 또 우리 상황의 깊은 데서 나오는 말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지금 말씀하시는 것 외에 주로부터 오는 말씀은 따로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지금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이 말씀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대해서는 단 한 가지의 대답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말씀이 우리에게 올 때에 우리 자신을 개방하여 놓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저항하려 한, 그것이 우리 힘에 겹도록 강할 때는 우리는 그것을 위증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임하여 온 말씀이 우리의 생활 방식과 사고 방식의 철저한 변혁을 요구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성취할 수 없으며, 도리어 선과 악, 정과 사의 관습적인 생활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스스로를 주로부터 오는 말씀을 향해서 개방시켜 놓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들의 종교적 전통이나 문화적 창조에 있어서 또는 우리 영혼의 유곡(幽谷)이라든가 하는 어느 언저리에든지 특정한 장소를 지명할 수도 없습니다. 어떠한 장소도 주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달하는데 제외 시켜서는 안 됩니다. 그 말씀은 언제나 임재해 있고 또 우리로 그것을 깨달아 알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 말씀이 지금 여기서 들어가 채우려고 하는 것은 우리 영혼 속의 비어 있는 장소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마지막 문제는 여러분의 마음속에 비어 있는데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마음 문을 열지 않고서는 주님의 말씀을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활짝 열린 마음으로 듣고, 내적 생활에 빈곳을 지켜 가며 영적 청각을 날카롭게 하는 것, 이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