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루터 Martin Lu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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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마틴 루터 Martin Luther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마틴 루터(Martin Luther)
마틴 루터의 생애
루터는 1483년 독일의 작센안할트 주의 아이스레벤(Eisleben)에서 광산업에 종사하는 아버지 한스 루터(Hans Luther)와 어머니 마가레테 린데만 (Margarethe Lindemann)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중산층으로 생계에는 지장이 없었으나 상당히 검소하여, 그의 모친은 다른 동네 부인들과 같이 장작을 주웠다. 그의 부친은 교회의 타락을 묵인하지 않는 양심을 가진 기독교인으로 알려져 있다.
루터는 주의 기도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문장에 부담을 느낄만큼 엄격한 아버지의 그늘에서 자랐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진로문제도 자신의 적성과 흥미가 아닌, 아버지의 뜻대로 정해야 하였는데, 루터의 아버지는 아들을 법률가가 되어 사회적 성공을 하게 하려고, 에르푸르트 대학교에 입학시켰다. 루터는 교양학부에서 삼학(三學, 라틴어: trivium)[1]과 사학(四學, 라틴어: quadrivium)[2]을 각기 마친 후 1502년 9월에 문학 학사학위를, 1505년 1월에 17명 중 차석으로 시험에 통과하여 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예비학교를 마친 루터는 5월에 본격적으로 법률 공부를 시작하였다.
루터가 대학교에서 공부를 계속 하던 중, 집에 갔다가 에르푸르트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7월 2일, 슈토테르하임 근처에서 무시무시한 벼락이 옆에 떨어지는 순간 루터는 땅으로 엎어지면서 광부들의 수호성인을 부르며 소리질렀다.
“성 안나여, 나를 도우소서! 저는 신부가 되겠습니다!”
수도원에 들어가려는 생각이 이미 무르익었던 터라 루터는 뇌우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이는 데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3] 루터는 자신의 기대에 어긋나는 아들의 진로변경에 좌절을 느낀 부친의 분노어린 반대에도 불구하고 7월 17일, 에르푸르트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 은둔자 수도회” 소속 “검은 수도원”에 입회하여 수사신부가 되었다.
루터는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고뇌하였는데, 수도회에서는 그를 비텐베르크 대학교에서 공부하게 하였다.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요한 스타우피츠 교수는 루터가 성서에 대해 진지하게 공부하면 평안을 찾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를 성서학 교수사제로 임명하였는데, 스타우피츠 교수의 결정은 루터가 신앙적인 고민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루터는 성서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면서 칭의론에 대해 생각하였다. 칭의론은 인간은 죄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는다는 교리이다. 대표적으로 다음 구절을 들 수 있다.
“나는 그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복음은 먼저 유다인들에게, 그리고 이방인들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복음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길을 보여주십니다. 인간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성서에도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된 사람은 살 것이다." 하지 않았습니까?”/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1장 /공동번역성서
2. 루터의 종교개혁
종교개혁의 일반적 전제가 된 것은 로마교황권의 동요로 상징 지을 수 있는 것처럼, 중세 가톨릭교회 체제의 내부적인 구조변화이다. 가톨릭시즘은 중세유럽의 봉건제도와의 관계에서 일개의 거대한 법적 권력적 질서를 형성하였다. 교황권에 의해서 통괄된 성직자 신분의 계층질서, 지배체제만이 가톨릭시즘의 정통한 교의의 틀일 때, 모든 신앙 조항은 일종의 법적규정이라는 성격을 갖추며, 개인의 신앙은 신이 정한 교회의 전통적 권위에 대한 내면적인 복종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이런 권위나 그것이 강제하는 정통교의에 반한 신앙내용은 모두 으로서 세속권력의 협력 하에 엄격하게 금압되었다.
14세기경부터 정치적 의미에서의 봉건제도가 점차로 약체화되고, 각 지역에 영역적 집권적인 통일국가 체제가 구축됨에 따라서 원래 봉건적인 권력분산상황하에서만 그 보편성과 절대성이 보증되었던 교황권은 불가피하게 동요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교황의 아비뇽 유폐(1309~77)와 그에 이은 교회대분열(1378~1417)은 프랑스의 국민적 왕권의 대두에 의한 교황권의 공동화를 나타내는 전형적인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로마교회체제의 동요 중에서 몇 가지 종교적인 개혁이념이 탄생했다.
첫 번째
첫 번째는 교회대분열의 극복, 교회통치의 쇄신을 지향해서 열린 콘스탄츠 공의회(1414~18), 바젤 공의회(1431~49)의 두 공의회로 표현되는 개혁공의회 운동이다. 이는 주교계층이 중심이 되어서 교회통치체제를 종래의 교황절대주의에서 일종의 입헌군주제로 바꾸려는 것이며, 15세기 중엽의 교황권 제한주의(프랑스국민교회주의)의 성립이 나타내는 바와 같이, 국왕에 의한 중앙집권화의 노력과 그에 의해서 싹튼 내셔널리즘이 이와 결합하였다. 또한 이 체제개혁운동의 배후에는 속권과 교권의 분리를 제창하는 신학자 오캄 등의 새로운 교회통치이념이 작용하였는데, 가톨릭시즘의 중심적인 교의내용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진행 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