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을 밝혀주는 세종의 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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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어둠을 밝혀주는 세종의 얼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정치적, 사회적 동물이라고 칭하였다. 인간은 사회에서 살아가며, 사회로 인하여 존속하게 되며, 서로 대화를 나누고, 문화를 발전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군집생활을 하고 이로써 사회가 형성되었다. 사회가 형성되어 여러 명의 인간이 모이면 그만큼 여러 가지의 의견이 생긴다. 한 문제에 대해 여러 가지의 의견이 나오게 되면 의견 충돌이 일어나는 법이다.
이렇게 사회생활에서 일어나는 필연적인 대립·분쟁은 조정되고 통일적인 질서가 유지되어야 한다. 이처럼 의견조정을 위해 생겨난 것이 정치이다. 정치란, 국가라고 하는 공동생활의 틀 속에서 단순히 개개인의 풍습이나 도덕 등의 자율적인 규범만으로 유지되지 않는 질서를 국가권력을 배경으로 법과 그 밖의 방법을 동원하여 유지시키는 작용을 뜻한다. 정치는 좁은 의미로는 의회정치를 뜻하고, 넓은 의미로는 행정부를 포함한다.
만약 좁은 의미의 의회정치가 없다면, 행정부가 독단으로 국가를 다스리게 되어 횡포와 독선으로 국민의 권리가 침해를 받게 되어 도탄에 이르게 된다. 또 넓은 의미의 정치가 없다면 무정부 상태가 됨으로, 질서가 무너져서 사회적 혼란이 야기되고, 다른 나라의 침범에 적절한 대응이 불가능하게 된다. 이처럼 정치와 우리 생활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또한 정치를 하다보면 다른 나라와의 의견 충돌도 있기 마련인데, 이를 위해 생겨난 것이 바로 외교이다.
외교란, 국제사회에서 교섭을 통하여 국가간에 맺는 일체의 대외관계를 뜻한다. 물론 개인과 개인간의 관계에도 외교라는 말이 사용되지만, 일반적으로 국가와 국가간의 관계를 의미한다. 이 경우에도 한 국가의 대외정책 그 자체를 뜻하는 용어로 쓰이는가 하면, 대외관계의 처리방법을 가리키는 말로 쓰일 때도 있다. 전자는 대외정책의 결정이라고 하는 입법적 측면을, 후자의 경우는 대외정책의 수행이라는 집행적 측면을 가리키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좁은 의미의 외교는 후자, 즉 외교교섭을 뜻하는 말로 쓰이는 것이 보통이다.
이처럼 정치와 외교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정치외교학과라는 과가 생겨난 것이다. 정치외교학과에서는 사회 과학 중 주요 학문 분야인 정치학 일반 및 국제 정치 세계에 관계되는 사상, 이론, 제도, 역사, 기구, 조직상의 제반 분야를 연구·개발하고 이 분야의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한다. 나는 현재 정치외교학을 전공으로 하고 있는데, 관심이 있어 들어온 학과 인만큼 정치나 외교에 관해 좀 더 심도 있는 공부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얄팍하게나마 정치에 대해 배우다 보니 아직까지 우리나라 정치에는 후진성이 많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론 1987년 이전의 독재 정치 시대에 비해선 많이 발전했지만, 여전히 우리나라는 정당 간에도 누가 잘했는가가 아닌 누가 더 못했는가를 따진다. 또한 국민을 위한 정치보다는 자신의 실속을 챙기려는 정치인들의 모습은 안타까운 우리의 정치 현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그동안 걸어온 정치의 길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며, 본받을 점은 본받고 반성할 점은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 정치는 군주 내지는 왕이 통치하는 절대 왕정이라 볼 수 있는 데, 이는 국민들의 참여를 전제로 하는 현재의 정치와는 많이 다르다. 하지만 온고지신의 정신을 통해 조선의 정치를 다시 한편 살펴보고 반성하고 본받는다면 더 나은 대한민국이 되기 위한 올바른 정치를 펼 수 있을 거 라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조선시대 세종대왕 통치의 정치에서 우리 정치의 나아갈 길을 찾아보고자 한다.
조선시대에는 역대 총 27명의 왕이 있었다. 위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조선시대에는 중앙 집권적인 정치성향이 강했고, 조선시대 정치는 왕이 통치하는 절대 왕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절대 권력을 가진 자는 정치의 본질적인 목적을 잊고 자기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정치를 하기 쉽다. 실제로 조선 시대 27명의 왕 중에서는 백성을 위한 정치보다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정치를 한 왕들도 있다. 나는 27명의 왕 중 가장 우리가 본받을 만한 정치를 펼친 왕으로 세종대왕을 꼽고 싶다. 세종대왕은 글을 못 읽는 백성들을 안타깝게 여겨 한글을 창제하였을 만큼 백성을 사랑하였는데, 이처럼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친 세종대왕은 정치의 본질을 우리에게 다시 한번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
세종 대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유교정치, 찬란한 문화가 이룩된 시대였다. 이 시기에는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전반적인 기틀을 잡은 시기였다. 또한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반적인 기틀을 잡은 시기였다. 즉, 집현전을 통하여 많은 인재가 배양되었고, 유교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와 제도가 정비되었으며,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사업이 이루어졌다. 또, 훈민정음의 창제, 농업과 과학기술의 발전, 의약기술과 음악 및 법제의 정리, 공법의 제정, 국토의 확장 등 수많은 사업을 통하여 민족국가의 기틀을 확고히 하였다. 또한 세종대왕은 변계량, 신숙주, 정인지, 성삼문, 최항 등 장년층의 학자를 등용하여 정치자문, 왕실 교육, 서적 편찬 등 이상적 유교정치를 구현하였다.
세종 4년까지는 태종이 상왕으로 생존하여 있었으므로 태종의 영향이 계속된 시기였다. 1414년(태종 14)에 이룩된 육조직계제는 의정부 대신의 정치적 권한을 크게 제약하고 왕권의 강화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세종은 이러한 정치체제를 이어받아 태종대에 이룩한 왕권을 계속 유지하면서 소신 있는 정치를 추진할 수 있었다. 세종 대는 개국공신 세력은 이미 사라지고 과거를 통하여 정계에 진출한 유자 적 관료와 유자 적 소양을 지닌 국왕이 서로 만나 유교정치를 펼 수 있었던 시기였다.
세종대의 권력구조나 정치적인 분위기는 세종 18년을 전후로 하여 두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즉, 세종 18년에는 육조직계제가 의정부서사제로 개혁된 정치체제의 변혁이 있었고, 이듬해는 세자로 하여금 서무를 재결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정치적 분위기는 더욱 안정되고 유연하게 되어갔다. 따라서, 언관과 언론에 대한 왕의 태도도 비교적 강경한 자세를 보였던 그 이전에 비하여 훨씬 자유롭고 부드러워져서 이들에 대한 탄압이나 징계는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이와 같이 정치적 분위기가 변한 원인은 유교정치의 진전에서 찾을 수도 있다. 즉, 세종 전반기에 집현전을 통하여 많은 학자가 양성되었고, 그 학자들이 동원되어 유교적 의례·제도의 정리와 수많은 편찬사업이 이룩되어 유교정치 기반이 진전되었고 세종 18년에 육조직계제에서 의정부서사제로의 이행도 유교정치의 진전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치체제로의 변화는 왕의 건강 문제와도 크게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세종은 일찍이 신병 때문에 고통을 받아왔으므로, 정무가 왕에게 폭주하는 육조직계제는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즉, 유교정치를 펼 수 있었던 기틀은 정치적·제도적·문화적 기반의 성립, 왕권의 안정, 그리고 왕의 건강의 악화 등에 있었다. 이러한 요소들이 세종 전반기와 후반기의 정치적 분위기를 변화시킨 요인으로 볼 수 있다. 세종시대의 후반기는 왕의 건강이 극히 악화되기는 하였으나 의정부서사제아래에서 군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룬 가운데 성세를 구가한 시대였다. 의정부서사제는 6조의 업무를 의정부에서 심의한 후 왕의 결제를 받는 절차를 가진 체제로 황희를 비롯, 최윤덕·신개·하연 등 의정부 대신들은 중후하고 온건한 자세로 왕을 보좌하였고, 관료들의 정치적 기강도 그 전후에 비하여 건전하였다. 언관의 언론도 이상적인 유교정치를 구현하는 데 목표가 두어졌다.
한편, 집현전은 세종과 세종시대를 이야기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기관이다. 집현전은 중국과 고려시대에도 있었던 제도였고 조선 초 정종 대에도 설치된 일이 있으나, 조선시대의 집현전이라고 하면 세종 2년 3월에 설치한 것을 의미한다. 이때에 집현전을 설치하게 된 목적은 조선이 표방한 유교정치와 대명 사대관계를 원만히 수행하는 데 필요한 인재의 양성과 학문의 진흥에 있었다. 이에 따라 유망한 소장학자들을 채용하여 집현전을 채웠고, 그들에게 여러 특전을 주었으며, 사가독서를 내려 학문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곳에 소속된 관원은 경연관·서연관·시관·사·지제교의 직책을 겸하였고, 중국의 옛 제도를 연구하거나 각종 서적의 편찬사업에 동원되는 등 그들의 직무는 주로 학술적인 것이었다. 세종은 이들이 학술로써 종신할 것을 희망하였으므로 다른 관부에는 전직도 시키지 않고, 집현전에만 10년에서 20년 가까이 있게 하였다. 그 결과 수많은 쟁쟁한 인재를 배출하였는데, 이러한 인적자원이 바로 세종대의 찬란한 문화와 유교정치의 발전을 이루게 한 원동력이 된 것이다. 그는 정치적으로 중앙집권 체제를 운영하기 위하여 20년에 집현전을 설치하고 황희, 맹사성, 허조 등의 청백리를 등용하여 왕권과 신권의 조화에 노력하여 의정부의 독주를 견제했다.
또한 세종 대에 전개된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사업은 이 시대의 문화수준을 높이는 데 기틀이 되었다. 이 사업을 통하여 문화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정리가 이루어졌고 정치·제도의 기틀이 잡혀갔다. 이 사업의 주도자는 물론 세종이었고, 이 일을 담당한 것은 집현전과 여기에 소속된 학자들이었다. 또, 이 사업은 집현전 학자들의 학문이 향상되고 일할 수 있는 준비가 이루어진 세종 1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이 편찬물을 내용별로 분류하면 역사서, 유교경서, 유교윤리와 의례, 중국의 법률 및 문학서, 정치귀감서, 훈민정음·음운·언역관계서, 지리서, 천문·역수서, 농서 등으로 다양하고 방대한 것이었다. 즉, 정치·법률·역사·유교·문학·어학·천문·지리·의약·농업기술 등 각 분야에 걸쳐 종합 정리하는 작업이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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