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은 쿠데타인가 혁명인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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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516은 쿠데타인가 혁명인가1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한국정치론-
5.16는 구데타인가?
혁명인가?
5.16은 쿠데타에 대해서..
5.16을 통해 정권을 획득한 박정희의 통치는 그 이전의 한국 정치의 파행이 심화된 결과 이면서 동시에 이후 나타난 다양한 정치, 사회적 모순들의 근원이기도 했다. 이러한 5.16에 대한 연구는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왔다. 5.16을 통한 제 3공화국이 신생국에서 흔히 벌어졌던 군사 엘리트 등의 군사 정변 수준인지 아니면, 군사 정변의 수준을 넘어선 근대화 운동인지, 또는 혁명적 차원이었는지 여러 가지로 논의가 되었다. 이 연구를 통해 5.16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고, 그것의 성격은 어떠했는지, 5.16이 현대사에 미친 영향과 그 의미를 되새기며 그것의 과연 소수의 군인들이 정권을 잡으려한 쿠데타였는지 혹은 고도의 경제 발전을 이룩하게 한 혁명이었는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1.배경과 원인
5.16이 일어나게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당시 군부적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당시 한국의 사회적인 측면이다. 먼저, 군부적측면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군부라는 말의 의미를 먼저 살펴보자. 군부적이란? 정부나 국민에 대하여 군인을 중심으로 하는 성격을 말한다. 우선 군의 제도적인 측면에서 접근 할 수 있다. 당시 군은 6.25 전쟁 이후 급속히 성장하여 70만 명에 이르고 있었다. 1958년 60만 명으로 줄어들긴 했으나 여전히 대한 민국 내에 단일 조직으로는 가장 큰 규모였다. 또한 미국의 막대한 군사 원조 훈련 지도로 인해 질적인 성장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한국군은 국내의 조직 중에서 가장 근대화 되어 있었고 서구화 되어 있었다. 대학이나 관료 등과 같은 민간 (군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사용했다.) 보다 먼저 근대화 되어 제도적으로도 발전해 있었다. 이것은 군인들로 하여금 민간 엘리트들에 대한 불신감을 조성하고 나아가 진정한 국가 발전을 담당 할 세력은 군 밖에 없다는 일종의 소명의식을 낳게 하였다. 이는 5.16 직후 그들의 자신에 찬 발언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군 내부적인 불만에서도 이유를 찾아 볼 수 있다. 상급 장교의 부패와 이들을 야당과 민중을 탄압하는데 이용하는 이승만 정권에 대한 불만, 그리고 진급 기회의 소멸, 민주당이 경제 개발을 위해 군대를 감축할 예정이라는 것 등이 그들의 불만이었다. 이는 장면 내각 정부 이후 하급자(함께 교육을 받고 같은 전투 경험이 있는 청년 장교 집단)의 쿠데타로 이끌었다.
다음으로는 당시 우리나라의 사회적 측면이다. 건국 이후 이승만 정권의 부패와 군의 정치적 이용과 같은 정치, 사회적 파행은 이미 박정희를 주도로 한 세력을 중심으로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4월 봉기로 그들의 명분이 사라짐으로 인해 그들의 계획은 일단 연기되었다. 그러나 이후에 들어선 장면 내각은 이렇다 할 정치, 경제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그들의 불만은 더 증폭되었다. 특히 장면 내각의 진보 세력의 발호를 우려했다. 그리고 그것을 구실로 군대를 일으킨 것이다. 다른 사회적 측면으로서 수입 민주주의의 위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승만 정권과 함께 들어온 서구식 자유 민주주의는 타락하였고 학생 봉기로 이루어진 장면 정부도 별다른 성과를 보이지 못했다. 또한 정권을 잡은 민주당 내에서도 끊임없이 구파와 신파의 정파 싸움이 계속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5.16 세력들에게 강력한 군부, 관료적 국가와 효율적인 경제 개발을 명분으로 내세워 5.16을 일으키게 하였다.
2.전개 과정
1961년 5월 16일 새벽, 2군 부사령관 박정희 소장이 주도한 장교 250여명과 사병 3500여명은 한강을 건너 서울의 주요 기관들을 점령, 국가권력을 장악해 나갔다. 이 주체 세력들은 ‘군사 혁명 위원회’를 조직, 이 위원회가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의 3권을 통합·장악한다고 선언하고, 이날 새벽 군사혁명이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혁명에 필요한 조치로서 금융동결, 항구와 공항의 폐쇄, 정권의 인수, 의회의 해산, 일체의 정치활동 금지 등을 선포하고, 6개항의 「혁명공약」을 내걸었다. 당시 내걸은 6개의 혁명공약은 다음과 같다.
①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
②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공고히 할 것.
③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청렴한 기품을 진작시킬 것.
④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 경제의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
⑤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을 배양할 것.
참고문헌
참고문헌
고쳐 쓴 한국현대정치사- 김영명저, 을유문화사
한국현대정치사- 김영식 외 저, 집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