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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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병자호란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한국역사속의 전쟁
병 자 호 란
압록강 북쪽에 흩어져 살던 여진족은 임진왜란으로 조선과 명의 국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통일 운동을 크게 일으켜 1616년에 누루하치가 후금을 세웠습니다. 조선은 여진족이 처음 발흥하던 광해군 때까지는 중립 외교정책을 펴며 정면 대결을 피할수 있었으나 후금의 세력이 점차 강해져 1627년에 정묘호란이 일어나,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게 됩니다. 그 후 후금은 만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명나라를 공격하면서 조선에 대해서는 군신의 관계를 맺자고 요구합니다. 조선에서는 임진왜란때 도와준 명의 은혜를 저버릴수 없었으므로 청과 화의를 끊어야 한다는 주장이 조정을 휩쓸었고, 현실적으로도 황금, 백금 만냥과 전마 3천 필을 바치라는 등의 요구를 받아 들일 수 없었습니다. 후금은 1636년 4월에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태종 누루하치가 스스로를 황제라 칭했으며처음에 조선의 왕자를 볼모로 청에 보내라는 통보를 했으나 1636년 11월에 청은 조선의 왕자 대신 척화를 주장하는 신하를 압송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냅니다. 하지만 조선은 그것을 받아 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에 1636년 12월 청 태종은 직접 12만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에 침입합니다. 조선에서는 의주부윤 임경업이 백마산성에서 적을 맞았으나, 청군의 선봉은 그 곳을 피해 별동대를 한양으로 진격시켰습니다. 조선 조정은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못하던 중 14일에 적군이 개성을 통과했다는 보고를 받고, 김경징을 감찰사, 장 신을 주사대장에 임명하여 강화도를 지키게 한 후, 윤 방과 김상용의 책임하에 종묘사직의 신주와 세자빈 강씨, 원손, 봉림대군 등을 먼저 강화도로 피난시켰습니다. 또한 심기원을 유도대장으로 삼아 한양을 지키게 하고, 인조도 세자와 함께 강화도로 향했으나 청군이 이미 홍제원에 도달해 길을 막았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왔습니다. 그 후 이조판서 최명길이 청군의 진영에 나가 침입한 이유를 따지며 진격을 막는 동안 왕은 신하들과 남한산성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곳에는 신경진, 구 굉, 구인후, 이 서, 이시백 등이 수비군을 지휘했는데, 군사는 1만 3천이었고 양식은 50일분이 남아 있었습니다. 청군은 16일 남한산성에 이르렀고 다음해 1월 1일에는 청 태종이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직접 남한산성을 포위하자 조선군은 성 밖에서 여러 차례 적과 싸워 때로 이기기도 했지만 전세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었습니다. 또한 각 도에서 의병이 일어났으나, 이미 때가 늦어 남한산성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전쟁동안에 조선에서는 화의를 맺자는 주장과 끝까지 싸우자는 주장이 격렬하게 대립했으나 결국 최명길이 주도한 주화론이 김상헌과 정 온이 이끈 척화론을 누루고 대세를 장악합니다. 그러나 청의 요구는 조선의 임금이 직접 항복 의식을 치르고 척화 주모자를 결박해 오라는 강경한 것이어서 망설이던 중 1월 21일에 강화도가 함락되고 세자빈과 대군이 포로로 잡히자 결국 항복하기로 했습니다. 결국 1월 30일에 인조는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청 태종 누루하치에게 의식을 갖추어 항복하는데 인조는 누루하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세번 절을 하는 우리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이른바 삼전도의 굴욕으로 항복하는 수치의 역사를 남겼습니다. 이로써 전란이 끝나고 청군은 돌아가면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그리고 많은 백성을 포로로 잡아 갔습니다.
조선의 지배층은, 문화가 낮은 오랑케에게 당한 수치를 씻고자 명에 대해 의리를 지키고 청을 정벌하겠다는 북벌론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조선 내정의 독자성을 침해받지 안는 정도에서 청에 대한 사대관계를 줄곧 유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전쟁동안 명을 배반하고 오랑케에게 항복하는 것은, 죽는 것보다 못하므로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척화론과 종묘사직을 보호하고 백성의 희생을 줄이려면 현실적인 방안을 찾아야한다는 주화론이 맞섰습니다. 이 주화론은 훗날 영 . 정조때에 실학자들이 청나라의 앞선 문물제도 및 생활양식을 받아 들이자고 한 주장한 북학론으로 이어집니다. 이 북학론을 주장한 실학자로는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이덕무 등이 있습니다. 이 양쪽의 주장들은 국가 운영에 있어서는 서로 보완적이지만, 당시 백조대관들의 개인으로서는 어느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고통스런 문제였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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