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에타이와 킥복싱의 기원과 형이상학적 접근

 1  무에타이와 킥복싱의 기원과 형이상학적 접근-1
 2  무에타이와 킥복싱의 기원과 형이상학적 접근-2
 3  무에타이와 킥복싱의 기원과 형이상학적 접근-3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무에타이와 킥복싱의 기원과 형이상학적 접근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무에타이와 킥복싱의 역사
먼저 태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알려진 무에타이의 기원은 약 700년 또는 어떤 곳에선 2000년 전이라고도 하는데 원시시대 때부터 원시인이 사용한 킥이나 펀치가 무에타이의 기원이라 하면 할 말은 없다. 허나 무술의 역사는 그 무술이 정확히 기록되는 시기부터 역사로 인정해야 타당할 듯 하다. 13,14세기 태국의 국명이 샴이었던 스키타이 시대(1238년~1318년) 옆 나라인 미얀마와 전쟁을 자주하게 되었다. 그 당시 군인들에게 격투술과 호신술을 가르친 무술이 무에타이라고 한다.
당시 무에타이의 전승은 절에서 이뤄졌다. 남자들이 태어나면 용감한 전사가 되기 위해 무에타이를 권했다고 한다. 그 때는 지금처럼 글러브를 착용하지 않고 맨손이었으며 손에다 노끈 등을 감고 했다 한다. 그 전통식 무에타이를 무에캅추악이라 불렀으며 현재도 가끔 그러한 형식의 경기를 한다. 글러브를 착용한 것은 훗날인 1929년경으로 알려져 있다. 복싱 경기를 하기 위해 온 필리핀 사람으로부터 글러브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이다. (필리핀의 복싱 역사는 오래 됐다.)
그전까지 맨손으로 경기를 하다가 사망한 사람도 많았기에 정부에서 글러브 착용을 강력히 권장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무에타이는 태국인들의 오락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리고 그 오락이 도박과 어우러져 급속도로 발전했다. 동네의 축제나 절의 축제 때는 반드시 무에타이 경기가 열렸다. 아유타야 시대(1315년~1767년)부터는 코코넛 열매에 구멍을 뚫어서 거기에 물을 채운 후 거꾸로 두고 물이 세어 나오게 해서 물이 다 빠지면 경기를 끝내는 걸로 했다. 그리고 휴식을 취한 후 다시 경기속행, 상대가 항복하면 그걸로 경기를 멈추는 그런 식이었다. 이긴 사람에겐 상금이 주어졌고 군인간 경기에서는 이긴 선수의 계급을 올려주었다.
그리고 태국의 우수한 젊은이들이 외국으로 유학을 가기 시작하며 구미의 우수한 문화와 기술 등을 도입한 라마 6세시대(1881년~1925년)에 샌드백과 펀치 미트 등이 보급된다. 이런 훈련장비가 무에타이의 연습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지금의 링은 1929년에 도입됐다. 룸피니 공원 안쪽에 있는 영화와 무용을 공연했던 레저랜드를 건설할 때 국제식 복싱(권투)과 같은 링을 설치했다. 이것이 무에타이에 링이 등장한 시초이다. 이렇게 해서 현재의 무에타이 경기형식이 생겨난 것이다.
이번엔 킥복싱의 기원을 논해보자면 인터넷 사이트를 돌아다니다 보면 구로사키 켄지란 사람이 만들었다고 하는데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극진공수도 출신으로 선수를 인솔해 태국에서 대회를 벌이던 중 우연히 태국 챔피언과 대결했다 패한 것이 분해 메지로 짐을 설립해 후진을 키운다. 후지와라 토시오 등 일본의 전설적 선수도 여기서 배출됐으며, K-1 유명 파이터들을 배출하고 있는 네덜란드의 차쿠리키 짐과 메지로 짐도 여기서 운동을 배운 네덜란드인들이 자국으로 돌아가 세운 도장이다.
정작 킥복싱을 만든 사람은 노구치 오사무란 사람이다. 그는 일본 킥복싱의 역사가 된 메구로(目黑)도장 관장이다. 그는 당초 복싱 도장을 운영했지만 복싱 선수를 데리고 태국에 경기를 하러 가게 되면서 무에타이를 접하게 된다. (태국의 무에타이 대회는 복싱을 한 경기씩 끼워서 하는 경우가 많다.)
알다시피 무에타이는 도박이 허용되므로 관중들의 열기가 상상을 초월한다. 여기서 노구치는 이 운동을 일본에서 도입한다면 돈벌이(?)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 전부터 태국의 무에타이와 교류를 하던 극진회관 총수인 최영의 관장을 찾아가 무에타이를 일본으로 도입하자는 제의를 하게 된다.이 때 이 운동의 명칭을 바꾸게 되는데, 당시 이름은 생소한 킥파이트’였다.
그런데 무슨 연유인지 최영의와 협력은 결렬되고 노구치 혼자 ‘킥복싱’이란 명칭을 사용해 출발하게 된다. 그 해가 1964년이다. 그리고 사와무라 타다시란 스타가 등장하면서 킥복싱은 매주 금요일 저녁 7시 TV 황금시간 대에 방영 되는 황금기를 맞는다. 사와무라란 사람이 제주도 출신의 교포란 걸 많은 사람들은 모른다. 당시 시청률이 30% 이상 이었다니 가히 엄청난 반향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그 당시는 대부분 ‘짜고 하는’ 경기였었다. 킥복싱 붐 조성을 위한 피치 못 한 조치였던 셈이다.
한국의 킥복싱 역사는 어떨까. 국내 관련 단체 중 어떤 곳은 구판홍이란 한국인이 일본과 합의 하에 킥복싱을 만든 창시자라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의 킥복싱 역사에서 구판홍이란 이름은 어디에도 거론돼 있지 않다. 이를 초기에 격투기의 왕이란 뜻으로 ‘킹투기’라고 했다고 선배님들에게 듣긴 했지만 정확한 내막이나 연대를 알고 있는 사람도 없다. 이런 정황을 살펴볼 때 한국의 킥복싱은 일본에서 유입된 것이 확실하다.
요컨대 태국의 전통 무술이 무에타이이며, 이것을 모방해 일본에서 킥복싱을 만든 것이다. 때문에 경기규칙도 상당히 비슷하다. 간혹 어떤 이는 킥복싱엔 팔굽치기가 없지 않느냐고 묻는데 킥복싱도 팔굽치기와 무릎치기를 모두 사용한다. 라운드 규정은 둘 다 3분5회전이지만, 휴식 시간은 무에타이가 2분, 킥복싱이 1분으로 차이가 난다. 무에타이는 경기중 반드시 사라마 음악을 연주하며 경기 전 반드시 와이크루란 의식을 행하지만 킥복싱에는 그런 절차가 없다. 굳이 덧붙이자면 무에타이는 미들, 하이킥과 무릎치기에 점수를 많이 주지만 킥복싱은 로킥에도 점수를 주며, 펀치도 킥과 맞먹는 포인트를 부여한다.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