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포트 - 한국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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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한국 사회
1.천황과 전두환-5.18의 윤리
5.18이 일어나게 된 계기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된 후 전두환등의 신군부가 최규하 과도 정부를 유명무실하게 하고 정승화 계엄 사령관을 대통령 시해 사건의 용의자로 체포하면서 군부의 권력을 장악한 12·12 사태가 일어난다.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이 군사독재를 연장하려하자, 학생을 중심으로 수 만 명의 시민들은 1980년 5월 15일 서울역에서 계엄 철폐 등을 주장하며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자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 해산하게 된다. 이에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계엄령을 오히려 전국적으로 확대한다는 발표를 하고 학생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 휴교령 등의 민주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다. 5월 18일 전남대생 200여명은 휴교령이 내려진 학교에 들어가려다 계엄군과 투석전을 벌였고 부상당한 학생들을 보고 합세한 시민들과 시위를 벌였으나 계엄군의 폭력 진압으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면서 광주민중항쟁이 시작되었다. 즉 5.18 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에서 27일까지 전라남도 및 광주 시민들이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 퇴진, 김대중 석방 등을 요구하여 벌인 민주화운동이다.
박열과 이봉창 등 식민지의 애국청년들이 그 목숨을 노렸던 히로히토는 결국 천수를 누렸고, 일흔을 훌쩍 넘긴 전두환 역시 그의 전 재산 29만원을 아껴 쓰면서 호의호식하고 있다. 돌이켜 보면, 히로히토는 맥아더와 손을 잡기 전에 자신의 신민에 의해서 처단되어야 했고, 문민정부 시절 정치재판의 쇼가 벌어지기 전에 전두환은 광주의 핏빛 혼에 의해 붙들려 가야만 했다.
주범이 언죽번죽 역사와 시대를 희롱하고, 종범들은 그 희롱당한 역사와 시대 속에 변함없이 기생한 채 번창하며, 그 아래 민중의 한은 조직적으로 은폐되거나 왜곡될 때, 그 무책임의 체계는 반윤리적으로 전염된다. 이른바 15년 전쟁의 주범인 히로히토를 면책하고 그 무책임의 체계를 재가동시킨 것은 동북아시아의 공산주의 혁명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정책적 타협이었지만, 수백만의 무고한 생명을 죽음과 고통의 지옥으로 몰아넣은 일은 그 어떤 정책적 고려로서도 미봉할 수 없는 엄혹한 역사요 현실이다. 전후의 일본이 지금에 이르도록 과거사에 대한 헛소리를 반복하거나 그 국가의 경영철학이 아전인수격으로 두루뭉술한 이유도 전쟁의 주범인 천황이 건재했고, 여전한 추앙을 받았으며, 마침내 천수를 누린 사실과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그 천황은 정책적 고려나 정치적 담보가 될 수 없는 전범이었다. 그 천황의 배후에는 정책이나 정치의 타협으로서는 상쇄하거나 환치할 수 없는 수백만의
피와 살, 그 고유명의 고통과 한이 들끓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전두환 일당이 정치와 정책의 보호 아래 후안무치하게 광주의 핏빛 영혼들을 조롱하고 있는 한, 5.18은 우리에게 아무런 윤리적 빛을 던지지 못한다. 그런 뜻에서 빛고을(光州)은 아직 어둡다. 광주의 피가 윤리의 빛으로 거듭나 새로운 역사의식의 요청으로 다가오려면 만시지탄이지만 80년 5월의 범죄에 대한 엄혹하고 확실한 처벌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타협과 미봉, 그리고 섣부른 화해의 제스처가 남발되었을 뿐이며, 전두환을 비롯한 주범들은 건재하고 심지어 그 건재를 흉물스레 과시한다. 이 경우, 용서와 관용은 추악한 3류의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 광주의 5월이 번듯한 이름을 얻고 망월동이 성역화된 일은 내 눈에는 한갓 우스개요 역사에 대한 조롱이다. 전두환으로 대표되는 그 학살의 주범들이 여전한 권세를 누리는 한 5.18은 모욕받은 현실의 이름일 뿐이다. 암살은 이 모욕받은 현실을 구제하려는 판타지였지만, 나는 이 판타지조차 마감하려는 역설의 힘으로써 죽은 윤리를 다시 꿈꾼다.
5.18에 대한 진실은 그 당시 희생된 사람이 아니고서야 현실적으로 와 닫는 사람은 몇 안될 것이다. 분명히 진실은 있겠지만 당사자들이 아니고서는 진실을 명백하게 아는 사람도 없다. 역사는 사실은 하나지만 그것을 평가하는 사람에 따라서 그 의미가 확연하게 달라진다는 것. 또한 그 시대의 지배계층의 패러다임이 중요하다. 과거의 지배층은 폭동이라고 표현했고 현재의 지배층은 민주화운동으로 취급하고 있다. 5.18을 두고 찬반입장이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무력진압의 정당성을 두고 찬성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의 주장내용이나 증거내용들이 너무나 차이가 나서 한쪽 의견만 보면 무조건 그쪽의 주장이 맞다는 착각마저 드는 것이 현실이다.
2 . 어떤 다문화주의인가?
- 다문화사회 논의에 관한 비판적 조망
다문화주의란 이주문제의 적절한 해법을 모색하기 위하 시도이지만 근대 체제의 탈 전통적 인 진화의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명료하게 규정하거나 합의 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19c 이전의 산업사회를 거치기 전 농경사회가 낳은 씨족사회가 점점 산업화에 따른 도시로의 이촌향도현상이 늘고 있다. 그런 이유로 다양한 문화적 차이가 있는 사람들이 하나둘 씩 모이기 시작하고, 결국 그 들의 이룬 다른 세계는 다문화라는 의미의 말로 바뀌게 된다. 다문화의 시작이 결국 산업화에 따른 이윤추구의 시작이라는 의미에 반발하거나 반역하는 사람들은 적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산업화에 따른 이윤의 추구에 대해서 다문화사회는 빠르게 변질적인 것으로 변해가고 있다. 과거 누릴 수 있었던 소수주민의 대가족 체제에서의 정(情)과 훈훈함 같은 것들이 없어졌다. 엄밀히 말하면, 없어졌다곤 표현하지 못한다. 다만 그 것들이 들어나지 않고, 점점 고향의 것처럼 되어 가는 것이 문제 인 것이다. 점점 늘어만 가는 인구 속에서 문화의 다양성이 고증되고 있는데 과거의 것이라고 신기하게 보기만 한다면 그 것은 필시 잘못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당시에는 이런 문제들이 화두가 될 만큼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다문화중의라는 말 또한 1960년대 말 서구의 시민권운동을 기폭제로 1970년대 미국 캐나다 스웨덴 등의 전형적인 다인종 국가들에서 활발한 논쟁이 개시됨으로써 공론장에 특별한 삶의 자유와 권리 보장을 위한 정체성 정치 혹은 정체성 인정의 정치를 뜻하는 것을 알려져 있다. 그런 것들을 몇 가지 찾아보도록 하자
한국사회에 다문화 사회 담론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2005년 이후다. 외국인 노동자 수가 증가하고 농촌 총각들의 국제 결혼이 활발해진 사회적 배경에서였다.
2006년 일어난 하인즈 워드 열풍은 이같은 다문화 사회 담론의 팽창에 도화선 역할을 했다. 당시 미국 슈퍼볼에서 스타로 떠오른 하인즈 워드의 어머니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를 한국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국민적 정서가 커진 것이다. 정부도 국내 외국인 정책을 개선하려는 의지를 밝힘으로써 다문화 사회 담론을 촉발했다. 이런 움직임은 세계화 흐름 속에서 한국 사회의 변화와 그로 인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책이기도 했다. 다른 어떤 국가보다도 단일 민족이라는 믿음이 뿌리 깊었던 한국 사회에서 외국인 수의 증가는 낯설고 불안한 현상이었다.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다양한 문화와 마주치고, 그것을 소화해야 하는 스트레스 상황에 놓였다. 세계화로 인한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도 한 요인이었다. 주로 제3세계에서 온 이주 노동자들이 저임금 일자리에 투입된 것은 저소득 계층의 불만을 불러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이주 노동자는 사회적 불안과 불만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따라서 다문화 사회 담론이 제기된 맥락에는 사회적 균열을 봉합하고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하려는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다. 한 연구는 한국 사회에서의 다문화 담론이 정부와 학계, 언론이라는 세 축에 의해 전략적으로 구성되어 왔음을 밝히고 있다.(안지현, 2007, 한국사회에서 다문화주의 담론의 배치와 그 성격에 관한 연구,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이런 담론 속에서 초점은 다문화와 이주민들의 사회적 자산으로서의 가능성에 맞추어져 있었다. 위로부터 구성된 다문화 사회 담론은 제도적이고 정책적인 수준에서의 변화를 이끌어 냈다. 하지만 그것은 사회 구성원들의 일상을 세밀하게 포괄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동네와 거리, 일터 등의 공간에서 타자와 마주쳤을 때의 대응 방식이나 감정은 문화적인 수준에서 형성되는 것이고, 문화는 정치적인 캠페인을 전개한다고 해서 하루 아침에 변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존 다문화 사회 담론은 이주민들을 한국이라는 단일민족의 공동체 안에 포섭해야 할 이방인으로 위치 짓는다는 한계 또한 가지고 있었다. 특히 제3세계의 이주민들은 종종 한국의 우월성을 확인해주는 열등한 민족으로 묘사되었다. 정치적 캠페인, 공영 방송에 편성된 이주민 소재 프로그램은 그런 이미지를 만드는 데 한 몫 해 왔다. 농촌에 시집 온 필리핀인 며느리는 김치 담그는 법을 배움으로써 비로소 한국인으로 인정 받았고, 다문화 가정의 아들은 축구 경기를 보며 대한민국~을 외치고 20세가 넘으면 군대에 간다는 조건으로 이 사회에 공존할 자격을 얻었다. 하지만 진정한 다문화 사회는 하나의 공고하고 우월한 문화 속에 다른 문화들을 일방적으로 적응시키는 것이 아니라, 여러 문화가 열린 상태로 교류하고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는 바탕에서 공존하는 상태다. 그런 민주적인 상태가 다양성을 가능하게 하고, 다양성은 문화적 상상력이 발현될 수 있는 기본 조건이기 때문이다.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박경태 교수는 지난 2월 11일 이주여성긴급지원센터에서 열린 이주민과 다문화사회 이론 세미나에서 "다문화 사회를 위해서는 화이부동, 즉 화합하되 동일함을 강요하지 않는 문화가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문화 사회는 국내 거주 외국인 100만 명 시대라는 사실로 인해 자연히 만들어지는 단계가 아니다. 제 안의 다양한 문화적 가능성을 포용하면서 그들 간 창조적 교류가 일어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하고자 하는 의지에 의해서만 도달할 수 있다. 이주민들을 중심 테마로 삼고, 이주민들이 참여하는 다양한 문화 현상에 주목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런 사례들이 제도, 정책적 수준에서의 다문화 사회 담론보다 훨씬 더 사회 구성원들의 일상에 긴밀하게 닿아 있기 때문이다. 특히 방송, 영화, 문학 등 대중적인 문화 장르에 주목한다. 그것은 이른바 고급 문화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쉽고 빈발하게 경험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