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의 천국
분야
hwpⅠ. 서론
1976년 발표된 이청준(李淸俊)의「당신들의 천국」은 나환자들이 거주하고 있는 소록 도를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이다. 현역 군인인 조백헌 대령이 새로운 병원장으로 부임하면 서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소록도를 나환자들의 천국으로 만들어가려는 조백헌 대령과 그 에 강한 불신을 가지고 시종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소록도 사람들의 대립을 중심으로 전개 된다.
일반적으로 독서 후 사람들이 가장 기억나는 인물이라 함은 흔히 ‘주인공’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나는 이청준의「당신들의 천국」을 작년부터 여러 번 읽었음에도 주인 공인 조백헌 대령에 대해 크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였다. 조백헌 대령은 자기가 옳다고 생 각하는 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는 신념 위에 기초하여 병원장으로서의 권력을 행사 한다. 그러나 여기서 이러한 신념이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왜 자신의 목숨을 걸면서까지 필사적으로 이루려 했는지에 대해 작품 내에서는 암시된 것이 단 하나도 없다. 다시 말해 그의 행동에는 그 행동을 설명할만한 개연성이 없는 것이다.
이에 주인공인 조백헌 대령을 대신하여 내가 매력적으로 느꼈던 인물은 소록도 나환자 병원의 보건과장 이상욱과 중앙리 장로인 황희백 노인이다. 이들은 소록도 내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이들이며 조백헌 대령과 대립하면서도 실질적인 조언과 함께 소록도 의 비밀에 대한 여러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들에 관해서는 아래 본론에서 자세하게 다루 도록 하겠다.
Ⅱ. 본론
Ⅱ-1. 인물 1 : 보건과장 이상욱
표면적인 이야기만 본다면 이청준의「당신들의 천국」은 그저 조백헌이라는 열성적인 한 인물의 무용담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단순한 이야기로 그치는 것이 아 닌 그 인물에 대한 여러 비판을 통해 복합적인 이야기로 이어가고 있는데, 바로 그 비판 을 가능하게 하는 인물 중 한 명이 이상욱이다.
본 소설의 제 1부와 2부는 이상욱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이상욱은 조백헌이 동상을 세 우려는 인물이 아닌가에 초점을 두고서, 소록도에 천국을 세운다는 명목 하에 그가 실제 로 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의 명예욕이나 과시욕을 내보이기 위한 것이라는 비판적 의식 을 지니고 있다.
이상욱은 한민이라는 소설 지망생의 습작 소설을 통해 과거를 드러내고 있는데, 과거 원생들에게 자유와 사랑의 상징으로 비친 대상임과 동시에 그 자유와 사랑을 배신한 배 신자의 아들로서 자라난 인물이다. 그렇기에 원장의 입장에서 환자를 대하지 않고 원장 의 권력 행사를 감시하여 원생들의 배반자가 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이러한 그의 모습에 나는 그가 비록 회의적이고 미온적인 인물이라 할지라도 그가 자라난 배경 을 생각했을 때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고, 그것은 드러나지 않은 불명확한 이유로 문둥 이들의 희망을 지키려 했던 조백헌 대령보다 더 기억에 남을 수 있도록 도왔다.
더불어 이상욱이 여러 등장인물들 가운데 가장 잊혀지지 않는 이유는 여러 특성과 유 형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상욱은 주동자(Protagonist)이자 반동자 (Antagonist)의 역할을 모두 지니고 있는데, 사건의 중심에 자리하면서 행동을 주도하는 주동자의 역할을 하는가 하면 대립적인 입장에서 투쟁하기도 한다. 전자의 경우 소록도 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원생들의 무관심한 태도에 분노하는 조백헌을 조소하며 섬 곳곳을 주도하지만, 반대로 후자의 경우 황장로와 조백헌 대령의 대립에 있어 떨어진 권총을 집어 들고 나선 이상욱의 모습은 반동자의 모습을 드러낸다. 또한 블라디미르 프 롭(Vladimir Propp)의 민담 구조 분석을 통해 구별된 31종의 기능에 근거하여 일반적인 인물의 유형을 분류하였을 때, 조백헌의 입장에서는 상황에 따라 이상욱이 조력자 (Helper)가 될 수도 있으며 때로는 악한(Villain)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 있어서 그는 그의 다양한 특성을 드러냄으로서 입체적인 인물로 내게 어필(Appeal)되었다.
이상욱은 소록도의 어느 다른 원생들보다 제법 똑똑한 인물이다. 부정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교활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적어도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영리하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부의 후반부에는 조백헌 원장에게 섬을 떠나라 충고를 한 뒤 이상욱은 홀연히 섬을 떠난다. 하지만 떳떳하게 나루를 건너는 것이 아닌 여태껏 환자들이 섬을 도망쳐 왔던 방법으로, 즉 구북리 돌부리 해변가의 차가운 밤바닷물로 뛰어들어 힘겹게 섬을 빠 져나간다. 이는 이상욱이 일부러 만든 소동으로서, 조백헌 원장으로 하여금 더 이상은 소록도를 견딜 수 없게 하려는 압력적인 수단이다. ‘조원장 자기로 하여금 끝내는 그 스 스로 섬을 떠나지 않을 수 없게 하려는 음흉스럽고도 지능적인 협박 행위였다’ 이처럼 소설에 서술된 내용과 같이 그는 섬의 원생들로부터 과거 배반의 기억을 되살려 원장을 떠나게 하려는 지능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이러한 면에서 나는 이상욱이 다른 섬사람들 처럼 그저 원장을 적대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적이고 능동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에 대해 흥미가 동했던 것 같기도 하다. 남들과 똑같이 행동하는 사람보다 훨씬 튀는 인물 이기에.
마지막 3부에서 원장에게 보낸 이상욱의 편지에는 그에 의해 표현되는 진정한 천국이 드러나 있다. 원장과 섬사람들은 결코 같은 운명을 살 수는 없기에 원장이 꾸미고자 한 섬사람들의 낙토가 원장과 섬사람들의 공동 천국은 될 수 없으며, 문둥이들의 천국은 그 것이 밖의 인간의 천국과 대립될 때 이미 천국이 아니라 문둥이들의 수용소가 되어버린 다는 것이었다. 이상욱에 의해 밝혀지는 진정한 소록도의 천국은 제도적인 천국이 아닌 변화가 가능한 발전적 천국임을 뜻한다. 아래는 이상욱이 원장에게 보낸 편지 중 일부이 다.
하지만 진정한 천국이라면 전 그것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에게 먼저 선택이 행해져야 할 것이고, 적어도 어느 땐가는 보다 더 나은 자기 생의 실현을 위해 그 천국을 버릴 수 도 있어야 하는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 ……(중략)…… 울타리가 둘러쳐진 천국이 진짜 천국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문둥이를 위한 문둥이만의 천국을 꾸미시려는 원장님의 의지 바로 그것 속에 이미 그 보이지 않는 철조망은 마련되고 있습니다.
진정한 천국에 대해 말하고 있는 이러한 편지의 내용에서 모두 드러나고 있지는 않지 만, 여기서 이상욱은 조백헌 원장을 원망하거나 비난하면서도 소록도에 대한 관심과 노 고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이는 이상욱이 나름 섬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나 스스로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이상욱은 비록 당대 지식인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인물이지만, 초반의 나름대로의 정적 이고 회의적인 태도를 지나 이후 한밤중에 일어났던 조백헌과 황장로의 대립에서 스스로 목소리를 높이는가 하면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자신이 숨겨왔던 일부의 비밀을 드러냄으 로써 발전적 성격(Developing character)의 인물로 거듭난다. 이상욱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이러한 극적 성격(Dramatic character)을 가진 인물이기에 이야기의 흐름에 따 라 그의 변화를 좇으며 나도 모르게 빠져든 것이 아닐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