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_장강일기_저자 정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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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내용
    독후감
    장강일기
    저자 정정화
    이번에 읽은 책 장강일기는 사실 나도 처음 들어보았던 우리나라의 위인이신 정정화님에 대한 이야기였다. 알려지진 않았지만 우리나라를 위한 헌신을 정말 많이 하셨던 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이 선생님께서는 평생동안에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도맡아서 하셨으며, 무려 여섯번이나 독립운동에 대한 자금을 모으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까지도 걸고서 활동을 했던 분이시다. 정말 독립운동가로서 한 나라를 세워가기 위하여 헌신을 하는 모습을 책을 통하여 보면서 감사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 같다.
    다들 알다시피 대한민국의 임시정부가 1919년에 상해에 생기게 되며 이것이 1940년에는 중경에서 자리를 잡게 되었는데, 이 사이의 세월이 27년이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정말 말로 표현을 못할 힘든 독립운동을 계속한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 속에서 대한민국 독립을 외치며 힘을 쓰셨던 분 중의 한분이 바로 장강일기를 기록하신 정정화 선생님이신 것이다. 이 선생님에 대해서 더 자세히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선생님은 1900년 8월 3일에 수원에서 벼슬을 하셨던 정주영의 2남 4녀 중에 셋째 딸로 서울에서 태어나게 되었다. 아버지 정주영은 고향인 충남 예산에 많은 땅을 가지고 있는 부자였었지만, 정정화는 자신이 여자라고 하는 이유로 인하여 이 때의 신식 학교에 다니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자신이 이전에 집에서부터 어깨너머로 천자문이랑 소학을 익히게 되었으며, 성인이 되서는 영어랑 신학문을 공부하게 되어 동 시대의 신교육을 받았던 여성들과 비슷한 수준에 이르렀고 뒤쳐지지 않았다.
    이렇게 살아가고 계셨던 선생님은 열 살에 동농 김가진의 3남인 김의한과 결혼을 하게 되면서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김가진은 구한말의 문신이었는데, 그와 함께 대한협회의 회장을 맡아서 무너져버리게 된 국권을 회복시키는 것에 앞장을 서게 되었으며, 대동단이라는 것을 만들어 내는 등 여러 가지로 나라위하여 헌신을 계속해서 해오셨던 우국지사였던 것이다. 3.1운동이 일어난 직후인 1919년에 이 운동이 일어난 직후 김가진은 아들인 김의한과 중국의 상하이로 망명을 가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시작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그 전선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아버지와 남편이 중국으로 떠나게 된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스무 살의 겁 없는 여인은 다음 해 1월에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일본의 눈을 피하여 혼자서 먼길 상하이로 떠나게 된다. 그곳에 도착을 하자마자 맞닥뜨리게 되었던 것은 독립운동보다는 당장에 자신이 먹을 것을 해결해야하는 생활고였다. 마찬가지로 당시에 상하이의 임정 가족들의 생활은 넉넉지 않았고, 식사라고는 주먹덩이의 밥과 한두 가지로 된 반찬으로 끼니를 해결 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리고, 누구나 값이 싼 천으로 만들어진 중국 의복인 창산을 입었었고, 헝겊신을 신고 다녔던 것이다.
    이렇게 정정화 선생님은 상하이에 있었던 임시 정부의 살림살이를 보고서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이 되었었던 이유는, 당시의 임시정부가 세워졌을 시기에는 연통제 등이 존재하고 있으면서 국내와도 연락을 했으며, 군자금도 지원받고 있긴 했지만 멀리 떨어져 있고 일제의 감시가 심하게 있었던 이유때문에, 기본적인 의식주 부분도 해결이 되지않았던 형편이었다. 그렇게 해서 정정화는 이러한 상황을 보고 자진을 해서 국내로 잠입하여 군자금을 모아올 것이라는 결심이 서게 되었으며, 이를 실행하게 된다. 당시 조마조마한 상황속에 국내에 잠입하는 것과, 더해서 군자금까지 모으는 것을 성공하여 상해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녀는 아무나 쉽게 해내지 못하는 일을 거뜬하게 수행할 수 있게 되었으며, 심지어는 그 이후로도 다섯번이나 더 국내로 가서 군자금을 추가로 모으게 되고 연락책을 맡고 있는 등 임시정부에 있어서 아주 커다란 임무를 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여섯번이나 독립자금을 모으기 위하여 임시정부로부터 받게 된 비밀지령을 수행하게 된일, 그러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가 되어 잡혀가기도 했던 일, 그리고 우리가 아는 역사처럼 1938년 중국 장사에서 백범김구를 비롯하여 많은 임시정부의 사람들이 저격을 당해서 중상을 입게 되었던 것, 그리고 공습을 당하게 된 일이 이 책에 생생하게 담겨져있었다.
    정정화 선생님은 이렇게 한 나라를 살리기 위하여 자금을 운반하게 되었던 한국형 잔다르크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도 사람들이 정정화 선생님을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정정화 선생님도 자신이 그렇게 불리고 있는 것을 은근히 좋아했다고 한다.
    임시정부가 중경생활을 하고 있을 때에도 항상 빠른 일처리를 했으며 업무에 대한 감각, 그리고 모든 업무들에 있어서 깔끔한 마무리를 이뤘던 것, 그리고 책임성 등으로 임시정부를 도왔으며, 그것부터 시작해서 한독당 등에 책임이 있는 역할도 맡아서 대외적으로 활동을 하는 것도 원활하게 진행 하였다.
    정정화 선생님은 임시정부의 사람들이 중경을 떠나게 된 이후에도 일본에 남아서 12월 한 달 동안에 뒷정리를 하는 것을 모두 마치고서야 이듬해 1월이 되서 한국 땅으로 다시 발걸음을 향했다고 한다. 그렇게 다시 한국땅에 도착을 하게 되었지만, 이후에 나타나게 된 신탁통치부터 시작해서 남한과 북한으로 분열되는 상황을 보고 다시 절망의 마음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정부기구의 위원을 맡아달라고 하는 이시영 선생의 제안을 받았던 부분이었다.
    ‘내가 정치 일선에 몸을 담고 있지는 않았으나 외자인 성엄이 정치계에 있었고, 주위의 여러 어른이나 친우들이 또한 정치의 거센 물결을 타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30여 년이 라는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을 정치현장의 와중에서 지내지 않았던가? 그러한 내 정치경력을 시험해 보기라도 하듯이 정계의 손길이 내게 뻗쳤다. 정부조직에 참여하지 않겠느냐는 제의가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정정화 선생은 반쪽짜리 정부라면 그곳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 민족적으로 죄를 범하게 되는 짓이라 보며 거절하게 되었다. 위원을 맡게 되면 앞으로 자신이 얻게 될 명예와 같은 것도 있을 것인데, 오로지 자신의 신념, 나라에 대한 사랑을 가장 최우선적인 순위로 기억하며 거절했다는 모습을 보고는 오늘날의 우리나라의 모습과는 정말 다르다는 생각을 했으며, 우리나라가 정말 본받아야 하는 자세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거기다가 해방 이후에는 남한을 점령하게 된 미 군정이 임시정부에게 개인 자격으로 들어와야 할 것을 강요했고, 입국을 하는 과정에서 임시정부에 소속되어있었다는 것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후에도 너무나 혼란스러운 해방 정국에서 백범 김구 주석이 암살당하게 되었으며, 6.25 전쟁까 생기게 되면서 강제로 납북된 남편과도 생이별을 하는 상황이 생기게 된 것이다. 정말 슬픈 일이 아닐 수가 없다. 하지만 선생님은 또 적과 내통을 하게 되었다는 혐의를 가지고 종로경찰서에 끌려가게 되어 친일파 출신이었던 경찰들에게 뺨을 맞으면서 수난을 당하는 등의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해야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로도 한동안은 요시찰인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어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시절에도 겪어보지를 못했던 많은 고난을 해방된 조국, 한국에서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의 협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활동을 했었던 정정화는 사랑하는 국가에서 자신에게 저지른 이러한 사건이 발생하게 된 이후에 더 이상 젊은 시절에 있었던 용기와 자신감이 생기지 않고, 그것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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