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적답사] 서울 문화유적 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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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문화유적답사] 서울 문화유적 답사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서론

본론
1. 사전 조사
1) 고려 말의 상황과 위화도 회군
2) 조선의 건국
① 한양 천도와 그 배경
역사 속의 한양
풍수지리설
정치적 배경
② 조선건국 과정에 나타난 사상적 배경과 왕권강화를 위한 노력
숭유척불정책을 택하게 된 배경과 그로 인한 산물
왕권강화를 위한 이성계의 노력 (궁궐 및 도성의 건축과 제도 정비)

2.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답사지역으로 선정한 장소들

3. 답사 일정

4. 답사장소 조사 (답사 순서대로 나열- 사진은 최대한 답사하며 찍은 사진을 첨부 )









결론

함께 찍은 사진 및 개인 소감
본문내용
서론

주제 선정 동기 및 배경

1392년, 조선왕조의 성립은 한국사에 큰 분수령을 이루었다. 새 왕조를 세운 주역들은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제시하고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자비와 중생구제라는 불교의 세계관을 벗어나 인간중심적인 유교의 현실관에 충실하였고,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여 국가의 모습을 갖춰나갔다. 그 중심에 태조 이성계가 있었다. 우리는 이성계를 중심으로, 조선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그가 남긴 역사적 산물과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배경을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여러 유적과 연결시켜 재조명하고자 한다.




본론

1. 사전 조사

1) 고려 말의 상황과 위화도 회군

고려 말, 원나라를 등에 업은 권문세족의 횡포는 극에 달했고, 충선왕 등이 나름대로의 개혁을 펼치려 했으나 원나라가 버티고 있는 한 전면적인 개혁은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원이 명과의 전쟁으로 어지러워지기 시작하자 고려 내 개혁의 기운도 서서히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왕위에 오른 사람이 바로 공민왕으로써 원에 대항하고, 원의 간섭을 벗어나고자 신돈을 등용하여 여러 개혁을 실시하였다. 그의 첫 개혁 상대는 기철이었는데 그 일당을 제거하자 그 아들이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고려에 쳐들어오기도 하였는데 이때 이들을 물리친 인물이 바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이다. 그러나 공민왕의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권문세족의 갖은 술수에 결국 신돈은 반역 혐의를 쓰고 처형되고, 이로써 공민왕의 개혁 또한 좌절되었다. 권문세족은 공민왕을 시해한 뒤 10살 밖에 되지 않은 꼭두각시 우왕을 세웠고, 그러자 그들의 횡포는 더욱 심해졌다.
공민왕의 부재로 인해 고려 백성의 희망은 신진사대부들이 되었는데, 문인 출신인 성리학자들로 이루어진 신진사대부들이 무력을 갖추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그들은 무력을 가진 무장과 결탁하고자 하였다. 이런 이유에서 이성계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성계가 고려 전체에 이름을 떨치게 된 계기는 우왕6년(1380)에 하삼도에 침범한 왜구를 토벌한 일이었다. 아군의 수보다 무려 10배 이상 많았던 왜구를 크게 격파했던 이 싸움의 이름은 황산대첩으로써, 당시 이성계의 나이 45세였다. 당시만 해도 이성계는 최영과 함께 고려를 지탱하는 두 기둥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