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무역의 제왕 장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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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해상무역의 제왕 장보고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서론
2.본론
3.결론
4.참고문헌
본문내용
1.서론
우리 역사상 가장 미스터리 같은 위인 중의 한 분은 장보고(張保皐,?~841) 청해진 대사이다. 그는 통일신라시대 인물이면서 당시 중국, 일본의 정사(正史)에 등장할 정도로 국제적으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국제적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게 없다. 그는 태어난 곳도 확실치 않다.(권11 문성왕 7년조)의 기록을 보면 문성왕(文聖王, 839~856)의 차비로 장보고의 딸을 맞이하려 할 때 조정의 신료들은 그가 해도인(海島人)이라는 점을 들어 반대했다. 섬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왕의 외척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섬 출신인가 하는 의문을 풀어줄 만한 문헌자료조차 없다. 다만 그가 해상왕국의 근거지를 설치한 청해진(현재 완도)이 고향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을 뿐이다.
장보고의 가문이나 가족상황 역시 전혀 알 수 없다. 다만에는 중국 저장성 출신의 귀화인으로 어부생활을 하던 백익(白翼)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설과 완도에 군진을 설치하여 사병을 양성하는 호족 출신의 아들설 등 가설로 제기되고 있다.
더욱이 그의 후대는 완전히 단절됐다. 그의 피붙이들은 대역죄인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모두 죽음을 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이름 또한 현존하는 역사서마다 다르게 표기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궁복(弓福)으로 쓰고 있는 데 반해 당나라 저명한 시인 두목(杜牧, 803~852)은 그의(권6)에서 장보고(張保皐)로 명기하고 있다. 등에서는 장보고(張寶高)로 쓰고 있다. 이렇게 많은 이름 표기가 있지만 편의상 장보고(張保皐)로 표기할 것이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동아시아 해상무역을 장악한 국제적인 인물치고는 개인관련 정보나 기록물이 하나도 없다. 장보고에 관한 기록을 담은 역사적 기본사료가 국외보다 빈약하다는 것은 참으로 의외이다.
신라시대 장보고에 대한 기록물로는 김부식(1075~1151)의 (1145)가 처음이다. 일연(1206~1289)의 도 있다. 이밖에도 장보고에 대해와를 원용해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는 사료로는 동국통감, 동사강목 등이 있다.
장보고의 행적과 더불어 왕성했던 해상무역활동을 면밀히 살펴보자.

참고문헌
4.참고문헌
윤명철,『장보고 시대의 해양활동과 동아지중해』학연문화사, 2002
최민자,『세계인 장보고와 지구촌 경영』범한, 2003
허일․최재수․강상택․이창억 外 共著,『장보고와 황해해상무역』국학자료원, 2001
황상석,『장보고를 알면 세계가 열린다』눈,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