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한국사대관`과 이를 통해 바라본 두계 이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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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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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두계 이병도의 삶과 행적 3. 두계의 역사 연구 성과와 관점
1-1. 두계 이병도의 생애 3-1. 이병도의 역사 연구
1-2. 조선사편수회와 진단학회 3-2. 두계의 고대사를 바라보는 관점
1-3.『韓國史大觀』과 두계 사상

2. 두계 이병도 사학의 특징 4. 이병도 사학의 한계와 의의
2-1. 실증사학
2-2. 두계 사학의 형성 과정
2-3. 두계 사학의 구체적 성격과 연구

본문내용
두계 이병도는 1886년 8월 14일 경기도 용인에서 출생하였으며 1910년 보성전문학교 법학과에 입학하였다. 이 시기 이병도는 국제공법학 사적 사례를 공부하면서 사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도일(渡日)하여 1914년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에 입학하였는데 이 시기 그는 랑케주의자였던 와세다 대학의 교수와 강사진들에게 실증적 역사 방법론을 배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이병도는 24세 때 귀국하여 중앙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31세 때 일제의 어용 기관으로 알려진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였다. 이 때는 민족주의 사학자 박은식이 중국에서 지은 한국통사, 한국독립운동지혈사가 국내에 유입되던 시기였다.
하지만 실제로 두계 이병도는 이 단체의 촉탁(囑託) 역할을 하였으며 핵심적인 위치에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시기에 조선사편수회에 적을 둠으로서 규장각의 고서(古書)들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한다.
그는 1934년 5월 11일에 진단학회를 결성하였다. 이 진단학회는 국문학, 역사학 등 다양한 분야의 실증주의자들이 모인 단체였다. 진단학회가 조선인이 주축이 되어 만든 최초의 학술 단체라는 점과 실증을 우선시함으로서 학문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세련성을 기할 수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진단학회가 학술사적으로 가지는 위치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해방 이후 그는 1945년에서 1962년까지 서울대 문리대 교수로 재직하였고 동시에 1955~82년까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지인(知人)의 부탁으로 1960년 문교부 장관을 지냈으며 1962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를 지내는 등 왕성한 사회적인 활동을 하였다. 1989년 타계하기 전까지 그는 1966년 성균관대학교 교수 겸 대동 문화 연구원장에 취임하는 등 지속적으로 학문 활동을 하였다. 그의 주요 저서에는『韓國史大觀』, 『高麗時代 硏究』등이 있으며, 학술적 업적으로 문화훈장 대한민국장, 학술원 공로상, 서울특별시 문화상, 5.16민족상 등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