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기행]경복궁 및 창덕궁에 대해서

 1  [건축기행]경복궁 및 창덕궁에 대해서-1
 2  [건축기행]경복궁 및 창덕궁에 대해서-2
 3  [건축기행]경복궁 및 창덕궁에 대해서-3
 4  [건축기행]경복궁 및 창덕궁에 대해서-4
 5  [건축기행]경복궁 및 창덕궁에 대해서-5
 6  [건축기행]경복궁 및 창덕궁에 대해서-6
 7  [건축기행]경복궁 및 창덕궁에 대해서-7
 8  [건축기행]경복궁 및 창덕궁에 대해서-8
 9  [건축기행]경복궁 및 창덕궁에 대해서-9
 10  [건축기행]경복궁 및 창덕궁에 대해서-10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건축기행]경복궁 및 창덕궁에 대해서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경복궁
①근정전
②경회루
③광화문
④향원정
⑤자경전
⑥아미산 굴뚝

2.창덕궁
①인정문
②인정전
③낙선재
④관람정
⑤연경당
본문내용
경복궁



사적 제117호. 역성혁명(역성혁명)으로 조 선을 세운 이성계(리성계)와 그 지지자들은 고려의 서울인 개경(개경)으로부터 도읍을 한양성(한양성)으로 옮겨 신도(신도) 경영 에 착수하는 동시에 궁궐의 조성도 착수하 였다. 1394년(태조 3) 9월 신궐조성도감(신 궐조성도감)을 두고 청성백(청성백) 심덕부 (침덕부), 좌복야 김주(금주), 전정당문학 이염(리념), 중추원학사 이직(리직) 등을 판사에 임명하여 실무를 담당, 해산(해산:북악산)을 주산(주산)으로 삼고 임좌병향(임좌병향:북북서에 앉아 남남동을 바라다봄)의 터를 잡았다.
원래 태조는 고려시대 남경(남경)의 이궁(이궁:궁정동 일대) 터를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새로운 왕조의 뻗어나는 기세를 수용하기에는 너무 좁은 터전이라 하여 그 남쪽에 따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10월에 한양으로 도읍을 일단 옮긴 태조는 수도 건설에 박차를 가하여, 12월 3일에 궁궐과 종묘를 짓겠다고 산천신(산천신)에게 고사하고, 이튿날 개기(개기)하여 주야로 작업을 진행, 1395년 9월에 낙성을 보게 되었다. 명칭은 《시경》의 군자만년 개이경복(군자만년 개이경복)이란 글귀에서 따서 경복궁이라 하였다. 궁내에 준성된 전각은 총 390여 칸이었다.

①근정전
국보 제223호. 조선 초기부터 역대 국왕의 즉위식이나 대례 등을 거행하던 곳으로, 1395년(태조 4)에 지은 것은 임진왜란 때 불타고, 현재의 것은 조선 말기인 1867년(고종 4) 11월에 흥선대원군이 중건(重建)한 것이다. 다포양식(多包樣式)의 건물로, 현존하는 최대의 목조건물이다.
이성석축기단(二成石築基壇) 위에 세워졌으며, 정면 5칸(30m). 측면 5칸(21m)의 중층 팔작지붕의 큰 직사각형 건물이다. 기단의 4면은 석란(石欄)으로 둘려지고, 전후좌우면에는 쌍봉운무늬[雙鳳雲文]를 조각한 돌계단이 있어 화강암판을 깐 뜰과 연결되며, 정원 좌우에는 정1품 이하의 품석(品石)을 세웠다. 건물 내부에는 10개의 높은 기둥을 정면으로 4개, 측면으로 3개씩을 세워 천장을 받들게 함과 동시에 궁전 안을 중앙부의 내진(內陣)과 주위를 도는 외진(外陣)으로 구분하는 역할을 겸하게 했다.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