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학과윤리] 공리주의의 반격과 칸트적 동물권의 구성가능성

 1  [공학과윤리] 공리주의의 반격과 칸트적 동물권의 구성가능성-1
 2  [공학과윤리] 공리주의의 반격과 칸트적 동물권의 구성가능성-2
 3  [공학과윤리] 공리주의의 반격과 칸트적 동물권의 구성가능성-3
 4  [공학과윤리] 공리주의의 반격과 칸트적 동물권의 구성가능성-4
 5  [공학과윤리] 공리주의의 반격과 칸트적 동물권의 구성가능성-5
 6  [공학과윤리] 공리주의의 반격과 칸트적 동물권의 구성가능성-6
 7  [공학과윤리] 공리주의의 반격과 칸트적 동물권의 구성가능성-7
 8  [공학과윤리] 공리주의의 반격과 칸트적 동물권의 구성가능성-8
 9  [공학과윤리] 공리주의의 반격과 칸트적 동물권의 구성가능성-9
 10  [공학과윤리] 공리주의의 반격과 칸트적 동물권의 구성가능성-10
 11  [공학과윤리] 공리주의의 반격과 칸트적 동물권의 구성가능성-11
 12  [공학과윤리] 공리주의의 반격과 칸트적 동물권의 구성가능성-12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공학과윤리] 공리주의의 반격과 칸트적 동물권의 구성가능성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들어가며 : 피터싱어의 공리주의적 동물권의 반격
1. 공리주의에 대한 칸트주의 의무론적 비판
2. 피터싱어의 생명 공리주의의 논리구도
3 ‘선험성’에 입각한 동물권의 재구성
4. 동물 계몽주의와 야생동물
5. 물자체와 산업동물
7. 코페르니쿠스적 전환과 반려동물의 유정성
6. 칸트의 실천이성과 실험동물과 동물윤리
나오며 : 칸트주의적 동물권의 재구성을 위하여
본문내용
2. 피터싱어의 생명 공리주의의 논리구도

피터싱어는 『동물해방』에서 동물의 권리를 공리주의 입장에서 논증하면서, 동물까지도 포괄할 수 있는 생명윤리를 구성하고자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 논증의 절차는 인간과 동물 사이에서 벌어지는 훈육과 폭력을 떠받들고 있는 동물의무론에 입각한 인간중심주의를 내파하지 않고, 비껴가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피터싱어는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여부라는 ‘유정성’의 태제를 통해서 동물도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감성적 주체로서 등장시킨다. 이 유정성이라는 테제만 비추어 봐도 인간이 동물에게 저지르고 있는 사육, 도살, 사냥, 동물실험 등은 폭력의 극단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피터싱어의 공리주의 입장에서는 생명체가 모두 행복해야 할 공리를 갖는 상황에서 인간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타 생명체에게 폭력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부당한 일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타 생명체에게 폭력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으로 피터싱어는 채식주의를 권장한다.
물론 ‘우리들이 먹고 있는 동물들도 고통을 느낀다’는 명제에 대해서 인식능력을 갖추지 못한 동물들에게 고통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라는 반문을 한다면, 매우 인식론적인 문제로 다시 파고드는 경향이 될 것이다. 피터싱어에 의해서 감성적 영역에서의 다루어지고 있는 이 유정성의 의미는 실지로는 극소태제로서 제안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유정성은 ‘고통을 느낀다’라는 수동적인 반응의 의미로서 한정될 것이 아니라 ‘정을 느끼며 피드백 할 수 있다’라는 적극적인 의사소통적 능력으로 바뀌어야 한다. 즉, 반려동물의 대부분이 갖고 있는 유정성은 바로 이 정을 느끼고 피드백 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단순한 고통의 여부만으로 한정할 수 없는 보다 확장된 선험적 능력이 동물에게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유정성의 의미는 동물들이 갖고 있는 의사소통행위능력으로 볼 수 있으며, 정이라는 차원이 단순한 감성적 차원을 넘어서 식별 불가능한 영역에서 벌어지는 의사소통의 능력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성의 능력을 제외한 나머지의 영역에서 동물이성은 유정성의 의사소통의 능력을 의미하고, 동물감성은 야성성의 자연과의 피드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은 동물도 고통을 느낄 줄 안다라는 가장 기본적인 문제제기를 통해 동물의 학대적 현실을 고발했다는 측면에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동물의 유정성을 너무도 고통의 여부로 한정해서 사고하다보니 마치 동물에게는 어떤 소통의 능력조차도 없는 수동적인 주체인 것으로 사고되는 한계를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을 느끼고 주고받는 능력을 갖고 있는 동물의 유정성은 하나의 동물이 갖고 있는 의사소통의 이성능력으로까지 확장시켜 사고할 필요성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행위와 마음이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행위자체가 하나의 마음을 의미한다는 베이트슨의 『마음의 생태학』에서의 핵심적인 테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자연생태 속에서 형성되는 마음의 문제는 자연의 동역학 속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자체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물의 마음의 문제는 동물의 행위 속에서 느껴지는 것이며, 반려동물의 귀여운 행위는 동물들이 참으로 아름다운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선험성’에 입각한 동물권의 재구성

선험적 인식능력의 테제는 아무래도 ‘지능’과 같은 문제는 아닐 것이다. 지능과 같은 문제에서는 아이나 정신장애인, 식물인간, 동물에 대한 차별은 정당화될 수밖에 없다. 동물에 있어 선험성의 문제에서 유정성은 매우 중요한 교두보라고 할 수 있다. 동물이 의사소통의 행위능력을 갖고 있다는 전제를 수긍한다면, 문제는 어떤 성격의 의사소통일 것인가의 문제일 뿐이지, 그러한 선험적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는 부차적인 것이 될 것이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정을 느끼고, 피드백하면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다양한 형태의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동물들의 의사소통은 형태, 중복, 패턴이 문제일 뿐이지, 매우 자연스럽게 의사전달에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될 수 있다. 단어와 개념을 사용한 의사소통만을 다루는 것은 아이와 같은 상태의 의사소통의 문제를 도외시한 특수한 의사소통만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정성은 동물선험성이라는 개념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상학적 지위를 갖는 선험적 행위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지능IQ이라는 차원의 문제가 선험적 인식능력이라면 칸트주의는 매우 희화화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선험성의 차원은 행태 공명적 차원에서 다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되며, 의사소통을 성공시킬 수 있는 형태 공명적 행위능력을 갖고 있느냐의 여부라고 할 수 있다. ‘강아지가 꼬리를 흔든다’는 단순한 사실은 ‘반가워하는구나’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며, 그것은 우리의 감성적 인식을 공명시키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의사소통에 성공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행위능력을 선험적으로 갖고 있는 동물의 경우에 그것의 권리를 말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동물의 권리는 의사소통적 주체로서 동물이 선험적인 능력을 갖고 있는 권리적 주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동물에게서 의사소통의 선험적 능력을 발견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정을 느낄 수 없는 냉혈한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인간도 정이라는 감성을 통해서 피드백하고 느끼고 교감하는 작용을 하는 경우가 많으며, 그것조차도 인간의 동물성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통각적 능력조차도 사실 동물적 직관에 의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이 초감각적 의식이기보다는 형태, 중복, 패턴에 따른 감성적 인식일 뿐이다.
여기서 동물 선험성이 결과적으로 동물권을 옹호하는 의미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동물들이 후험성의 술어적 의미의 ‘길들이다’라는 행위로서 피드백 되기보다는 선험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