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와 역사] 위화도 회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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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기후와 역사] 위화도 회군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목 차
1. 서론
2. 위화도 회군 당시의 거시적 기후 요인
3. 위화도 회군 전개과정
4. 위화도 회군의 기후•지리학적 요인
5. 결론
본문내용

3. 위화도 회군 전개과정

위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14세기의 소빙하기로 인하여 원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으며, 그로 인하여 홍건적 등의 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홍건적의 난은 주변 국가들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는데, 고려의 경우 홍건적의 난으로 인해 밀려오는 도적들을 토벌하면서 이성계 등의 지방 무장세력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출 수 있었다. 또한 원의 멸망으로 인해서 명나라가 일어서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고려는 반원의 기치를 올렸던 공민왕이 노국공주의 죽음 이후 개혁에의 의지를 잃어버린 체 암살당하고, 친원적인 성향이 강한 우왕이 왕위에 등극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고려는 명과의 외교적인 갈등을 겪게 되는데, 그 와중에 명의 철령위 설치와 같이 외교관계가 극단으로 치닫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요동을 정벌하러 떠난 이성계는 우리가 모두 다 알다시피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여 정권을 잡고 후일 조선을 개국한다. 위의 과정을 보다 자세하게 알아보도록 하자.

 원인 – 공민왕 사후 우왕은 친명 기조에서 친원 기조로 외교적 방침을 세우게 되었다. 고려와 명의 갈등이 심화되는 과정에서 명은 “철령(鐵嶺)을 따라 이어진 북쪽과 동쪽과 서쪽은 원래 개원로(開元路)에서 관할하던 군민(軍民)이 소속해 있던 곳이니, 중국인•여진인(女眞人)•달달인(達達人)•고려인(高麗人)을 그대로 요동(遼東)에 소속시켜야 된다.” 라고 주장하며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여 옛날 원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려 하였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 우왕과 최영을 중심으로 요동정벌설을 주장하게 되었고, 이성계 등의 반대를 무릅쓰고 요동정벌을 계획하였다.

 진군 – 우왕은 송도(오늘날 개성)이 아닌 서경(오늘날 평양)에서 상주하며 전국에서 5만에 이르는 군인을 징집하였고 팔도도통사(총사령관)으로 최영을, 좌우도통사(야전사령관)로 각각 조민수와 이성계를 삼아 요동 정벌군을 구성하였다. 출정군은 1388년 음력 4월 18일에 출정하여 음력 5월 7일에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 진주하게 되었다.

 체류 – 하지만 장마철을 맞아 압록강이 불어나고 이로 말미암아 부교로 강을 건너려는 계획도 물 건너가게 되었다. 장맛비 속에서 진군을 멈출 수 밖에 없었던 요동 정벌군 야전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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