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문화] `오스트리아빈`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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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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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빈의 위치
2. 빈의 기후 및 식생
3. 빈의 역사
4. 빈의 관광지
5. 그 외 빈의 특징적 요소
본문내용
3. 빈의 역사

발트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도로와 도나우강의 교차점에 해당하는 이 지역에는 일찍부터 켈트족의 촌락이 있었으나 역사상에 이들의 이름이 나타나게 된 것은 1세기 중엽 로마제국이 북변지역의 요새로서 빈도보나(Vindobona)라는 군단(軍團) 주둔지를 설치한 뒤부터이다. 100년 뒤 게르만의 한 종족 때문에 파괴되었으나, 170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 의해서 재건되었다. 민족이동 혼란기의 상황은 그다지 명확하지 않으나 8세기경에는 성(聖)베드로 교회가 건설되었다고 한다.

빈이라는 명칭이 나타난 것은 10세기경부터이지만 12세기에 들어서는 변경백(邊境伯) 바벤베르크가(家)의 소유가 되었고, 1137년 비로소 도시(Civitas)라고 불렀으며, 이후 도나우강에 의한 교역발달에 따라 점차 번영하였다. 1221년 상업독점권의 인정으로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1237년 황제 프리드리히 2세로부터 자유가 부여되어 제국도시가 되었다. 1251년 보헤미아에 영유되었으나, 1276년 합스부르크왕가의 소유가 되었다.

14세기에는 상업 및 문화 중심지로 인구도 점차 증가하고, 고딕양식의 대표적 건축인 장크트슈테판대성당 등이 건립되었다. 또 1635년 독일계 최초의 대학이 개설되었고, 15세기 중엽 이래 계속 신성로마제국의 사실상 수도로서 르네상스시대의 문화 중심지로 번영하였다. 1485년부터 수년간 헝가리에 점령되었고 또 투르크족의 진출과 세계 무역로의 이동 등으로 경제 활동은 약간 쇠퇴하였으나 정치 중심지로 제국의 많은 중앙관청이 설치되었다. 1529년 한때 투르크군(軍)에 점령되었다.

종교개혁시대에는 시민의 다수가 그리스도교 쪽으로 옮겼으나, 오래지 않아 가톨릭 세력이 다시 회복되어 이탈리아·에스파냐 등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였다. 1683년 또다시 투르크군에 점령되었으나 바로 탈환하였고, 그 뒤에는 합스부르크군에 점령되었으며, 합스부르크제국의 융성과 함께 유럽의 대도시가 되어 크게 번창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요제프 2세 시대인 18세기 후반에는 글루크·하이든·모차르트 등으로 대표되는 음악과 연극이 번영하였고 교육·연구기관이나 의료시설 등이 정비되는 한편, 도기공업 등이 크게 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