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사회] 조선전기 과거제도와 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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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사회] 조선전기 과거제도와 양인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 1392~1600년대 조선사회(朝鮮社會) 구조(構造)의 한 측면 -

제 1 절 서론(序論)
1392년 동요하던 고려를 계승한 조선은, 주자학적(朱子學的) 이상(理想)에 젖어 유가성인(儒家聖人)들이 기대했던 이상적인 세계를 실현하기 위해 헌신하던 사대부(士大夫)들에 의해 건국되었다.
전통시대 중국과 한국에서 과거(科擧)가 발달했고, 조선이 개국이후 1894년에 이르기까지 관리등용의 주요 방법으로서 경쟁적인 시험에 의존한 것은 유교적 표준에 따라 지(智) ․ 덕(德)을 겸비한 사람들을 선발하기 위해서였다.
오늘날의 학자들은 문과(文科)가 오직 양반가문의 사람에게만 개방되었으며 따라서 다른 모든 사람들, 특히 양인(良人)들에게는 폐쇄되어 있었다고 보고 있다. 서울대학교의 故 이상백 교수는 “개인의 사회적 신분을 근거로 엄격한 제한이 있었으면, 원칙적으로 양반 이외의 어느 누구도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갖지 못했다.”고 하며 북한의 학자들도 비슷한 입장을 취해왔다. 과거제응시는 오직 양반신분에게만 응시하도록 허용되었다고 하며 이것은 조선의 과거제도(科擧制度)는 중국과는 달리 한국의 사회구조를 고정시키는 작용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정은 정확하다고 할 수 있는가? 실제로 누가 이와 같이 중요한 문과(文科)에 응시하였을까? 등의 매우 중요한 문제인데도 불과하고, 명확한 대답을 찾기 위한 어떤 연구도 행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본고(本槁)에서는 과거가 양반에게만 독점적으로 개방되어 있었고 양인에게는 폐쇄적이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특히 양반계층의 형성과 관련하여 조선시대의 사회구조의 성격을 보다 잘 밝혀줄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 복잡성을 고려하여 본고에서는 조선 전기, 1392~1600년까지로 시기를 한정하여 살펴보겠다.
제 2 절 본론(本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