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해상무역과 대외 경제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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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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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고려시대 해상무역과 대외 경제정책
Ⅰ. 머리말
Ⅱ. 고려의 해상무역의 발전 배경
1. 고려 왕조의 출신과 대외 경제정책
2. 국제무역항 벽란도의 특징
Ⅲ. 고려와 해류를 통해 교역한 나라들
1. 송과의 무역
2. 요와의 무역
3. 금과의 무역
4. 원과의 무역
5. 일본과의 무역
6. 아라비아와상인과 그 외 상인들과의 무역
Ⅳ. 서방에 알려진 Corea
Ⅴ. 맺음말
Ⅰ. 머리말
우리는 역사를 편의상 왕조별로 나누어 시대를 구분하나 이는 시간적 흐름으로 연속성이 있고 사건 간에 우연성과 더불어 인과성을 가지기 때문에 시대별로 그 특징을 나눈다는 것이 애매하다. 국가의 공적인 일에 대해서는 왕조가 교체되면서 국가의 정책이 바뀌므로 각 시대별로 특징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해도, 민간의 일은 이러한 정책에 무디게 반응하고 공적인 일보다 직접적인 관계가 없기 때문에 더더욱 시대별로 각 시대의 특징을 단정지어버릴 수 없다. 이처럼 고려의 활발한 대외 무역활동은 고려왕조의 정책은 물론, 고려왕조가 들어서기 이전의 상황과 대륙 끝에 위치한 반도국가라는 지리적 위치가 작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는 신라 말 장보고의 무역활동을 기틀로 상업을 중시하였던 왕실에 의해 활발한 해상교역이 일어날 수 있었다. 고려시대 대외무역을 보면 해로를 통해 고려에 오는 경우, 개경에 이르는 관문인 예성강 입구의 벽란도를 거치게 되어 있었는데,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고려의 벽란도는 국제적인 무역항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실제로 이곳에서 많은 물자가 교류되었다. 우리나라가 외국에서 ‘코리아’라는 명칭으로 알려진 것도 고려 때 무역항 벽란도에 다녀간 아라비아 상인들이 고려를 서양에 알린 데서 유래한 것이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 당시의 무역항 벽란도에서 대외무역이 얼마나 성행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이 글에서는 고려이전의 국제교류가 어떠했는지, 그리고 그러한 교류가 대외무역을 중시한 고려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해 알아본 후, 이를 중심으로 고려의 국제 무역항 벽란도에 대해 알아보고, 고려와 교역한 나라뿐 아니라 고려와 이들 간의 교역이 어떤 형식으로 이루어 졌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Ⅱ. 고려의 해상무역의 발전 배경
1. 고려 왕조의 출신과 대외 경제정책
태조 왕건은 해양호족세력 출신으로서 건국 전에는 궁예 예하의 백선장군 해군대장이었으며, 건국 후에도 해군 총관역을 맡아 건국의 기틀을 다졌다. 왕건이 고려를 세운 시기는 장보고가 쌓아올린 해양경영의 위업을 이어받아 그 해상왕국이 무너진 지 70년도 채 안된 때였기 때문에, 왕건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려면 해상무역을 통해 이익을 얻어야 한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이를 적극 장려하여 신라 말기의 무역을 이어받아 초기부터 해외무역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또한 고려 왕실은 본래 지방 호족이면서 상인 출신이었다. 따라서 고려 왕실은 상업을 상당히 중시하였다. 고려는 중국을 비롯한 주변 국가들과 변하는 정세에 능동적이고 자주적인 자세로 대응하였는데, 사신을 통한 공무역과 상인을 통한 사무역을 적절하게 배합하여 최대의 이익을 취하는 실리적 무역정책을 추구했다.
10세기 전반 분열의 시대에 동북아 해상활동은 주로 중국과 한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절강지역에서 일어난 오월국은 해상활동에서 가장 적극적이었는데, 이는 절강지역이 당대(唐代) 이래 신라와 일본에 대한 해상교역의 중심거점으로 기능했던 전통을 오월국이 계승한 결과라 할 수 있겠다. 당시 한반도의 후백제와 태봉은 오월국과의 해상교역을 둘러싸고 서로 경쟁하고 견제하고 있었는데, 오월국과의 교역에 있어 후백제가 먼저 우위를 점했으나 태봉의 수군장군인 왕건에 의해 오월국과의 해상교류가 저지되어 태봉이 점차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 태봉과 후백제, 양국이 모두 대외 교류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이처럼 태봉은 대외 교류에 있어 후백제와 팽팽한 경쟁을 유지했고 태봉의 수군장군이었던 왕건은 누구보다 교류의 유익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를 건국한 후에도 대외 교류에 많은 관심을 쏟았던 것이다.
고려의 대외 경제정책은 중국에 송, 요, 금, 원이라는 나라가 생기고 사라짐에 따라, 그리고 각 국가의 영향력이 강해지고 약해짐에 따라 약간의 변화를 주고, 교류의 대상에 따라 각기 그에 알맞은 형태의 무역을 했으나, 중화민족인 한족과는 우호정책을 북방민족과는 대립적인 관계를 형성하면서 해상무역을 권장하는 개방적 대외정책을 기본으로 하였다.
고려는 건국 이후 오대(五代)로부터 송나라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역대 왕조에 대해 친선 관계를 유지하였고, 특히 송과는 문화적·경제적으로 밀접한 유대를 맺었다. 반면 북방 민족인 거란이나 여진, 그리고 몽고는 야만시하고 대립 정책을 견지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고려의 대외 정책은 동아시아의 국제 정국이 균형을 이루고 있을 동안에는 아무런 변동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거란ㆍ여진ㆍ몽고 등 북방 민족이 일어나 상대적으로 세력이 약해진 송을 압박하고 중원에 진출함으로써 고려의 전통적인 외교 정책은 변동을 가져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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