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신발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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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우리나라 신발의 역사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필자가 어린 시절만 해도 운동화를 신고 다닌다는 것은 꿈같은 현실 이었고,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신발은 거의가 고무신-그것도 검정 고무신이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고무신을 구경하기도 힘들고, 신고 다니는 사람도 보기 힘들다. 그만큼 물질문명의 풍요 가운데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다. 문명이 앞선 서구 사회에서는 우리보다 신발의 역사가 훨씬 앞서 있을 것이 분명하다. 운동화나 구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된 것도 서구 문명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한 때이기 때문이다.
본고에서는 문헌에 등장하기 시작한 우리나라의 신발의 변천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우리 문화사를 한 단면을 더듬어 보고자 한다.
문헌에 나타난 삼국시대 신발의 형태는 크게 화(靴)와 이(履)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신의 목이 있는 장화처럼 생긴 신발을 화(靴)라고 했고, 화는 말을 타거나 사냥을 할 때 발목을 보호하기 위해 신었던 신발이다. 그리고 목이 없이 고무신같이 것을 이(履)라고 했다. 화는 주로 말을 타고, 사냥을 했던 북방민족들이 신었을 것으로 여겨지며, 이(履)는 주로 농사를 짓던 남방계 민족이 많이 신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삼한과 삼국시대의 신발 형태는 고구려 고분벽화와 각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식리(金銅飾履)토기(土器) 등에서 그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데, 유물 중에 제일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신발은 낙랑(樂浪)시대 채협총(彩塚)에서 출토된 것으로, 이 신발은 이(履) 형태로서, 얇은 짐승껍질을 사용하여 상부와 바닥을 꿰매어 합치고 표면에 까만 옻칠이 되어있는 형태이다.
고구려시대 이(履)의 형태를 잘 나타내고 있는 고분벽화는 통구(通溝) 사신총(四神塚) 동벽(東壁)의 역사상(力士像)의 신인데, 형태로 보아 요즈음 신과 아주 비슷하다. 그리고 통구 17호분의 수문장의 신은 ‘곤돌라’같은 형을 한 매우 화려한 형태의 것으로 신 앞이 둥글게 위로 올라갔다. 무용총의 무용수들은 남자들은 이를 신었고, 여자들은 이와 화의 중간형을 신고 있다. 그 외, 통구 삼실총 서벽 예갑무인(禮甲武人)의 이는 신발 바닥에 못을 박아 스파이크처럼 되어 있다. 이처럼 바닥에 못을 박은 고구려의 이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금동리가 있다. 화의 형태는 매산리 사신총 현실 북벽과 쌍영총 후실 북벽 벽화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이 벽화에서는 인물 앞에 신이 놓여 있다. 그리고 무용총 수렵도의 기마 인물과 음식 나르는 여인들과 시중드는 남자들은 요즈음 버선 비슷한 형태처럼 묘사된 흰색의 화를 신고 있다.
가야의 것으로 알려진 흙으로 만든 신발 모양의 토기가 있다. 한 점은 보물 556호로서 4~5세기에 만들어졌는데, 호암 미술관 소장으로 가죽신발을 모방한 흙으로 만든 명기(明器)로 신발의 코가 두툼하고 투박하게 솟아 있으며, 둘레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구명을 뚫어 끈으로 조일 수 있게 하였다. 뒤꿈치는 가죽을 덧댄 형태로 약간 솟아있어 손으로 잡고 신을 수 있도록 한 履의 형태이다. 다른 한 점은 짚신 형 토기(숭실대 부설 한국기독교 박물관 소장)이다.
신라고분에서 출토된 금동리(金銅履)와 경주 천마총에서 발견된 백화수피(白樺樹皮) 모자에 그려진 기마인물상에서도 고구려 고분벽화와 동일한 옷차림에 같은 모양의 신발을 신고 있다. 경주 식이총(飾履塚) 출토 장식신발은 각종 문양이 장식되어 있는 가장 호화로운 신발이라 할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인 이 신발은 길이 33cm로 장의용으로 생각된다. 면으로 만들어진 화(靴)에는 화대(靴帶:신발 목을 매는 끈)가 달려 있다. 이 화대의 재료는 신분에 따라 백옥서대(犀玳)놋철동(銅) 등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통일 신라에서는 신발의 대에까지도 신분의 질서가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의 통일신라의 관직명에는 답전(踏典)화전(靴典)마리전(麻履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발을 만드는 것을 국가에서 관장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나타난 고려시대의 신발은 공식 석상에서는 혁리(革履)를 신고, 평상시에는 초리(草履)를 신었다고 한다. “혁리의 형은 앞이 얕고 뒤가 높아 형상이 기이하다. 나라 안 남녀 소장이 모두 신었다.”고 하여 중국의 신발과는 다른 독특한 신발이었으며, 신의 형태는 남녀귀천이 모두 같았음을 알 수 있다. 서민들은 삼국시대와 달리 화를 절대 신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는 신에 대한 기록도 비교적 풍부하고, 풍속화와 유물 등에서도 신의 형태를 살필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履에 속하는 혜(鞋)가 대표적인 신발이었으며, 靴는 주로 상류 계층에서 행사 때 사용한 신이다. 조선시대의 신발은 왕이나 왕비가 예식용으로 신었던 석(), 일반 복식에는 혜(鞋)를 신은 기록이 있으며, 제복과 조복에 신었던 흑혜(黑鞋), 일반 관리들의 관복(官服)에 갖추어 신었던 수화자(水靴子)목화(木靴), 그외 사대부 남자들의 평상화인 태사혜(太史鞋), 비 오는 날 신었던 진신, 사대부 여자들의 신발인 온혜(溫鞋)당혜(唐鞋), 그 외도 나막신유혜(鍮鞋)짚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