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일본 대중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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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문과학 일본 대중 문화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일본 문화의 이해
- 일본 대중 문화편-
● 들어가면서
일본의 대중 문화에 대한 발표를 준비하면서, 우선 그 대중문화라고 하는 것을 한정짓는 어떠한 특성을 파악하고 발표를 준비하려고 했다. 하지만 단순히 사전적 의미로써의 “대중 문화”를 가지고 막연하게 준비하는 것에 한계를 느껴서, 우리가 “대중문화”라고 할 때 쉽게 떠오르고 수긍이 갈 만한 몇 가지 대표적인 요소를 선별, 그 안에서도 대표적인 예를 들어 발표함으로써, 일반적인 일본의 대중 문화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는 방향으로 발표를 준비하였다.
● 대중공연 - 다카라즈카
다카라즈카 극단은 단원이 전부 여자이며, 남장을 하고 주연을 맡는 극단이다. 한큐 철도회사 대표이자 오페라배우인 코바야시에 의해 1914년 극단이 세워지고, 1924년 한큐철도가 끝나는 곳인 다카라즈카의 온천휴양지에 극장을 지었다. 모두가 여자인 연극의 관객은 당연히 젊은 여자들이 가장 많았다. 1년에 한번씩은 다카라즈카를 관람하는 250만팬들의 90%에 가까운 사람들이 주로 25세 이하의 여자들이다.
극단의 가장 끊임없이 사랑을 받은 작품은 서양에서 온 것이 아닌, 이케다 료코가 그린 일본만화 이다. 18세기 프랑스 귀족 집안에서 사내아이처럼 자라난 한 소녀의 이야기를 그린 것으로, 이 작품은 1974년에서 1980년까지 공연되었으며, 1989년에서 1991년까지 재공연되었다. 오늘날 관습과 행동양식이 바뀌었지만 다른 많은 일본 문화적 제도양식처럼 다카라즈카 극단도 스스로의 예술적 전통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명문고등학교를 나온 16세부터 20세까지의 소녀들이, 매년 지원자 160명 중 단지 40명만을 뽑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다카라즈카에 들어간다. 뽑힌 사람들은 다카라즈카 음악학교에 들어가 혹독한 과정을 거친다. 2년간의 교육 후에 신예 다카라지엔느(다카라즈카 연기자의 전통적 명칭)가 되면, 총 350명에 가까운 단원들의 네 개 극단(달, 꽃, 눈, 그리고 별) 중 하나에 들어가게 된다. 각각의 극단은 45일짜리의 시대극을 2년에 한번씩 다카라즈카 대형 극장(1993년에 재건됨)에서 공연하고, 30일짜리 시대극을 동경의 다카라즈카 극장에서 공연하며, 다른 주요 도시들을 순회한다. 공연요청이 늘어나는 것에 부흥하기 위해 타카라즈카 경영진은 디즈니랜드 옆에 다섯 번째 극단인 신 다카라즈카 극장을 1997년에 완공시켰다. 그 이후로도 다카라즈카는 화려하고도 감미로운 로망스를 계속 펼치고 있다.
● 대중음악 - 가요 홍백전
일본 TV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쇼는 12월 31일에 하는 이다. 가요 홍백전은 화려하게 제작되고 내용 면에서는 유행을 따르지만, 근본적으로는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 홍팀과 백팀으로 나뉜 두 팀이 관객들 앞에서 노래경연을 한고 관객과 심사위원단이 우승팀을 뽑는 형식이다. 트로피가 수여되고, 자정 15분 전에 쇼가 끝난다. 가요 홍백전은 NHK의 프로듀서인 긴도 쓰모루의 창작물이다. 그는 1945년 전쟁에 패한 후 피폐해진 국민 정서의 고양을 위하여 처음을 그 쇼를 착안했다. 각 팀에 5명씩 전체 10명의 가수들이 출연하였고, NHK의 라디오를 통해 방송되었다. 쇼의 위상이 연례행사로 자리 잡은 것은 4회 되던 해에 새해 전날로 시간을 옮기고부터이다. TV방송이 시작된 직후, 최초의 대형 특집 프로그램이 바로 가요 홍백전이었다. 1965년 컬러 TV의 도입과 함께 스타들은 그 쇼에 출연하기 위해 맹렬히 경쟁을 벌였고, 언론은 NHK 선정 위원회의 결정을 숨 가쁘게 보도하였다. 최종적으로 홍백팀에 출연키로 결정된 가수들은 그야말로 가요계의 정상에 도달한 것으로 여겨졌다. 가요 홍백전의 인기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절정에 달했다. 당시 시청률은 70%를 넘었고, 1963년에는 최고 81.4%까지 치솟기도 했다. 쇼의 전반은 젊은이들을 위한 일본 대중가요로, 후반은 나이든 사람들을 위한 엔카로 편성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가 저물고 1980년대에 들어서자 가요 홍백전의 시청률은 떨어지기 시작해 마침내 50위권까지 하락했다. 시청자들이 연말을 보내는 방법이 바뀌었고, 음악적인 취향도 다양화되었기 때문이었다. 1987년이 시작되자 NHK는 그 쇼를 정밀점검하기로 결심했다. 40회가 끝나면 폐지한다는 소문에도 불구하고 NHK는 자기변신을 시도했다. 1990년에 그 쇼는 각각 2시간씩 진행되는 전체 2부로 방송되었다. 1부는 주로 젊은이 지향적인 음악에, 2부는 나이든 사람들을 위한 음악에 할애했다. 그 이듬해에는 시청률이 50%로 상승해 가요 홍백전은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8세에서 80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같은 텔레비전으로 같은 음악 쇼를 보던 시대는 사라졌기 때문에 가요홍백전은 예전과 같은 인기를 얻지는 못할 것이지만, 최근 10년 동안도 계속해서 형식을 조금씩 변형시키며 계속되고 있다.
● 애니메이션 - 미야자키 하야오
미야자키는 2차대전이 끝나기 얼마전인 1941년 1월 5일 도쿄에서 태어났다. 그는 큰아버지가 경영하는 비행기회사에서 공장장으로 근무하는 아버지 덕분에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고등학교 때 이미 애니메이션을 만들기로 결심했으나 단지 테크닉만을 배우기 위해 미술학교에 진학하긴 싫었던 그는 학습원대학 정치경제학부에서 일본산업론을 전공했다. 대학 재학시절 만화에 뜻을 두고 만화연재를 시작했는데, 그것은 일본 공산당의 기관지인 “아카하타” 실렸고, 이라는 제목의 SF와 마르크스주의를 결합시킨 만화였다. 대학 졸업 후에는 “도에이 동화”에 입사해 애니메이터가 되는데, 입사 이유는 "미제국주의 디즈니에 대항하는 애니메이션을 일본에서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연수를 마친 후부터 , 등의 작품에서 동화를 담당했다. 이 즈음 소련의 장편 애니메이션 을 보게 되고 자신의 길에 확신을 얻는다. 그곳에서 미야자키는 주도적으로 노동조합 활동을 하며 서기장이 되었고, 당시 부위원 장이었던 “다카하타 이사오”를 만나는데, 이후 둘은 평생 창작의 동지로서 함께 하게 된다.
1971년에 다카하타와 함께 A프로덕션으로 이적한 후인 1978년에 TV 애니메이션 을 통해 연출자로 데뷔를 하였으며,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연출 데뷔는 그로부터 1년 후인 79년에 에서 이루어진다. 1984년 작품인 는 일본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인정받고 흥행에서도 크게 성공하였다. 그리고 도쿠마 서점의 도움으로 스튜디오 지브리를 설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