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속의전쟁 고려와 거란 여진과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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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역사속의전쟁 고려와 거란 여진과의 전쟁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한국역사속의전쟁
-고려와 거란,여진과의 전쟁-
우리나라와 거란/여진
우리나라는 북방민족과 끊임없이 관계하며 성장해왔고 이러한 관계는 우리나라의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는 북방민족을 대상으로 당근과 채찍 즉, 회유책과 강경책을 번갈아 사용하면서 당시 상황에 맞는 외교적 모습을 지녀 왔다. 이러한 방식은 거란이나 여진을 상대했을때도 큰 차이가 없었으며 북방민족은 민족 나름대로 우리민족도 우리 나름대로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서로를 이용하며 성장해왔다. 여진을 예로 들 경우 우리나라는 여진을 이용하여 거란의 동태를 파악하고 거란을 견제하는 역할을 맡기는 대신 그들에게 관직등을 수여해주고 식량을 제공해 주게 된다. 이러한 북방민족과의 끊임없는 관계가 고려에게는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고려는 크게 거란/여진/몽고와의 전쟁을 거치게 되는데 거란과 여진과의 전쟁은 둘 다 북방민족과의 전쟁이였지만 두 전쟁은 서로 다른 모습을 지니게 된다. 크게 분류하자면 거란과의 전쟁은 우리가 거란의 침입을 막는 것이 주가 되었다면 여진과의 전쟁은 우리나라가 여진을 대상으로 하는 여진 정벌의 의미가 좀 더 강하다.
거란과의 관계
10세기 초에 통일된 국가를 세운 거란(요)은 송을 공격하기에 앞서 송과 연결되어있던 정안국을 토벌하고 고려와의 관계를 개선하려 하였다. 정안국은 발해가 멸망한 뒤 발해의 유민들이 부흥 운동의 일환으로 압록강 일대를 중심으로 세운 나라로 거란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거란의 이러한 작전은 처음의 정안국 정벌까지는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고려와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정리하려던 다음 과정은 고려가 거란과의 친선관계보다는 오히려 북진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게 되면서 거란은 먼저 정안국을 정복한 후 고려에 대한 여러 차례의 침공을 시작하게 되었다.
거란은 993년 최초로 80만의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왔다. 거란은 고려가 차지하고 있는 고구려의 옛 땅을 내놓을 것과 송과 교류를 끊고 자신들과 교류를 할 것을 요구해 왔다. 고려에서 신하들은 항복하고 서경 북쪽 땅을 넘겨주자고 주장하게 되지만 서희는 식량이 넉넉하니 저들의 허점을 노려 공격하면 이길 수 있사옵니다. 헌데 땅을 떼어주고 화친하면 그들은 더 많은 요구를 할 겁니다. 일단 싸워보고, 땅을 떼어주는 문제를 논하심이 옳을 줄로 아옵니다.라고 왕에게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고 거란군의 수장이었던 소손녕은 고려를 침공해왔지만 고려 측에서 별 반응을 안 보이자 안융진을 공격하지만 대도수, 유방의 고려군에 의해 저지당하게 되고, 고려는 청천강에서 거란의 침략을 저지하는 한편, 서희가 거란과의 협상에 나섰다. 이 때 거란으로부터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인정받고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확보하는 한편, 거란과 교류할 것을 약속하였다. 서희가 펼친 교섭은 협상의 기본에 매우 충실했기에 상대적으로 강자에 입장해 있던 거란을 상대로도 전혀 밀리지 않고 오히려 강동 6주라는 커다란 것을 얻어올 수 있었다. 서희는 거란이 고려를 침공하는 이유가 고려에 대한 적대적 감정보다는 송과의 전쟁에 앞서 송의 우방이었던 고려가 혹시나 자신의 후방을 침공하게 된다면 전쟁이 매우 힘들어질 것이라 생각했기에 송과의 전쟁에 앞서 후방을 튼튼히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서희는 고려과 거란과 교류하지 못하는 것은 거란에 대한 악감정때문이 아닌 거란과 고려사이에 여진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이로 인해 거란과 고려가 교류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여진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고려도 거란과 교류를 하겠다고 밝혔다. 이 이야기를 들은 소손녕은 서희의 논리적인 말에 감탄하게 되고 요나라 성종에게 이를 알려 화의를 허락받고 낙타, 말, 양, 비단 등을 선물로 주고 되돌아 가게 된다. 이후 서희는 압록강 쪽 여진족을 몰아내고 동쪽 6주(강동6주)의 기초가 되는 성들을 쌓아 고려 땅을 압록강 쪽까지 넓히게 된다. 여기서 강동 6주는 흥화진(의주), 용주(용천), 통주(선주), 철주(철산), 귀주(귀성), 곽주(곽산)을 말한다. 하지만, 거란군이 퇴각한 뒤 고려는 대외적으로는 송과의 관계를 끊었다고 말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송과 친선 관계를 계속 유지하면서 거란과 교류하려 하지 않았다.
이에 거란은 강조의 정변을 계기로 강동 6주를 넘길 것을 요구하면서 50만 대군으로 1010년 다시 한번 고려를 침공해오게 된다. 여기서 강조의 정변이란 당시 고려 왕이었던 성종이 죽자 조카가 목종이 되고 목종의 어머니 헌애왕후는 김치양을 불러들여 권력을 쥐어주고 서로 배가 맞아 아들까지 낳게 된다. 그리고 이 아들을 왕으로 옹립시키려고 목종과 태조 왕건의 손자 대량원군을 죽이려 계획하게 되고 대량원군은 삼각산(북한산) 밑 절로 피했고 목종은 죽을 뻔했지만 겨우 화를 면하게 됩니다. 충격을 받게 된 목종은 채충순에게 대량원군을 데려오게 하고, 서북면(지금의 평안도)을 지키던 강조에게도 편지를 보내 자신을 지켜줄 것을 요구한다. 강조는 개경(개성)으로 가다가 김치양 일파를 만나게 되는데 그들이 김치양 일파가 반역을 하려고 왕명을 날조해 장군을 부른 거요. 역적 누명을 쓰지 않으려면 돌아가시오.라고 말한다. 그 후 강조는 왕은 세상을 떠났다. 즉시 와서 간사한 무리들을 평정하라.는 아버지의 편지를 받고 다시 개경으로 가게 되는데 평주(지금의 황해도 평산)를 지나갈 때 목종이 살아있다는 걸 알게 되고 돌아가면 반역자가 되고, 개경에 들어가 새 왕을 세우면 공신이 되게 된다는 것을 인지하고 강조는 결국 개경으로 가 김치양 일파를 체포해 죽이고 대량원군을 모셔와 새 왕으로 모시게 되는데 이게 바로 현종이다. 이때 목종과 헌애왕후는 몸을 숨겼는데 후환이 두려웠던 강조가 목종을 죽이게 되고 고려를 침공할 기회만 노리고 있던 요나라(거란)에서 갑자기 사신이 와 왜 전 왕을 죽였냐며 따지게 됩니다.
이로 인해 거란의 2차 침공은 1010년 요나라 성종이 직접 쳐들어오는데 흥화진(지금의 평안북도 의주)을 공격하지만 막히자 반을 남겨두고 반을 이끌어 강조가 있는 통주(평안북도 선천)로 침공해 가지만 당시 고려의 병기였던 검차공격(칼이 꽂힌 수레)에 요군은 계속 패배를 거듭하게 되고 강조는 이들을 오합지졸로 무시하며 자만에 빠지게 되고 이를 간파한 거란군은 고려군의 우측을 기습공격해왔고, 강조는 자만하며 막지 않다가 결국 거란군에 의해 사로잡히게 된다. 요나라 성종은 달래도 보고 모진 고문도 하며 자신의 신하가 되라 권하지만 강조는 나는 고려의 신하다라고 말하며 끝내 강조는 죽었고 이현운은 요나라에 항복하게 된다. 일이 이렇게 되자 신하들은 항복하게 되고 하지만 강감찬은 우리의 힘을 보여줘야 하옵니다라며 반격하겠다 왕에게 말했고 현종은 전라도 나주까지 피난을 가게 된다. 한편 흥화진의 양규, 귀주(평안북도 구성)의 김숙흥이 활약해 요군은 큰 피해를 입지만 두 장군은 결국에는 거란군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된다. 현종은 하공진을 보내 화친을 제의했고 요 성종은 고려 왕은 후에 요나라에 와 나를 만나고, 강동 6주를 반환하라 하고는 퇴각한다. 여기에는 거란군이 고려를 완전 점령하고 퇴각했다기 보다는 고려군에 의해 퇴로가 차단될 것을 두려워하여 고려와 강화하고 물러간 것으로 일방적인 침공보다는 고려와 거란과의 전쟁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후 여러차례 소규모의 침입을 시도하던 거란은 다시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1018년 제 3차 침공을 시작하게 된다. 3차 침공이 일어나게 된 이유는 요나라에선 계속 사신을 보내 이전 침공까지로 인해 생긴 약속을 지키라 하지만 고려는 이를 거절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자 1018년 소배압을 총대장으로 하여 고려를 쳐들어 오게 된다.거란의 이러한 움직임을 미리 예측하고 있던 강감찬은 강을 소가죽으로 막고 정예병 만 이천 명을 매복시킨 다음 가죽을 터뜨려 거란군의 대부분을 죽이고 빠져나온 거란군도 죽이게 된다. 크게 패한 소배압은 다른 길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김종현, 강민첨의 고려군에 포위되었고 소배압은 거짓 화친을 제의한 다음 도망치게 된다. 이후 몇 번의 싸움에서 진 거란군은 고생고생해서 귀주까지 오는데 강감찬이 10만의 거란군 중 수천을 제외하고 거의 섬멸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귀주 대첩이다.
이 후 국제정세를 살펴보면 애초 거란의 예상과는 달리 고려가 거란의 계속되는 침공을 막아내자 거란은 더 이상 고려를 공격할 수 없었고, 송을 침입할 수도 없게 되었다. 결국 고려가 거란과 싸워서 승리함으로써 고려, 송, 거란 사이에는 세력의 균형이 유지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 고려는 국방을 강화하는 데 더욱 노력하게 되고 강감찬의 주장으로 인해 개경에 나성을 쌓아 도성 수비를 강화하였고, 북쪽 국경 일대에 장성을 쌓아 거란은 물론 여진의 침입까지 방어하려 하였다. 이것이 압록강 어귀에서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이다. 사람들은 흔히 고려와 거란과의 전쟁을 말할 때 고려가 거란의 침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많은 문화재의 소실과 국토의 황폐화등 만을 거론하면서 고려가 완전히 패전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고려는 거란과의 크게는 3차, 실제로는 그 이상의 수많은 전쟁동안 결국에는 국토를 수호해 내었고 결국은 거란이 고려에 대한 침공을 포기한 자주적 국토 수호의 성공으로 평가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