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옥타비오 파스 활과 리라 2부 시적 계시 피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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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문과학 옥타비오 파스 활과 리라 2부 시적 계시 피안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옥타비오 파스 『활과 리라』2부 시적 계시 「피안(彼岸) 불교에서, 이승의 번뇌를 해탈하여 열반에 도달하는 일, 또는 그 경지.
1. 요약정리
인간은 리듬에 자신을 담으며 리듬은 이미지로 자신을 표출하고, 낭송을 통하여 인간에게 되돌아온다. 설명되기를 거부하는 의미의 다발인 이미지는 참여로 통하는 문을 연다. 시는 참여를 통하여 존재하게 되는데 그 참여란 다름 아닌 원초적 순간의 재창조이다. 이렇게 해서, 시에 대한 분석은 자연스럽게 시적 체험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이르게 된다. 시의 리듬은 신화적 시간과 유사해지고, 이미지는 신비주의의 용어와 섞이며, 시적 참여는 마법적 연금술과 종교적 영성체 의식에 가까워진다. 이 때문에 우리는 시적 작용이란 신성한 영역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되고, 신성함이라는 개념에서 혼란을 느끼게 된다. 때문에 이 글이 의도하는 바는 신성의 개념으로 시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양자 사이에 경계를 설정하고, 시란 단지 스스로에 의해서, 그 자체로만 이해될 수 있으며 다른 것으로는 환원 불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현대인이 발견한 사유와 느낌의 방식들은 이성이나 윤리적 혹은 현대적 관습이 감추거나 폄하했던 신성의 세계에 대한 것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이러한 주술적, 종교적 제도와 신화에 대한 연구가 유행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부재에 대한 증거들이며, 그 부재에 대해 느끼는 지적 향수의 편린들이다. 이런 이유로, 시의 세계를 신성의 개념과 분리하여 설명하려할 때 피할 수 없는 두 가지 문제와 부딪히게 된다. 그것은 먼저 시와 종교의 동시적 목적인 인간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본래의 의도로부터 시를 떼어놓는다면, 시는 하나의 무기력한 문학형태로 전락하는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라는 것과 다음으로 현대시의 프로메테우스적 과업은 종교와 맞서 싸우는 것인데, 이러한 종교와의 교전은 이 시대의 교회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신성함에 대한 새로운 신성함을 창조하기 위한 자발적인 의지에 의한 것이라는 역설적인 문제이다.
인간 생활과 마법, 과학에 대한 상관관계에 대해 설명하거나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한 몇몇 학자들 중 프레이저는 마법 이란 인간이 현실에 대해 취한 가장 오래된 행동 양식이며, 그로부터 과학과 종교 그리고 시가 파생되어 나왔다고 믿었다. 그리고 레비-브룰은 마법을 참여에 근거한, 전 논리적인 개념으로 해석했다. 그 외에도 프로이트, 융, 레비 - 스트로스 등 많은 연구자들이 있었지만 우리가 이렇게 다양한 현상과 가설에 대해 논할 때 제일 먼저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은 소위 원시 사회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멕시코의 라칸돈 부족처럼 문화가 어떻게 사라지느냐를 보여주는 경우나 에스키모 사회처럼 문명이 그대로 화석화되어버린 경우를 볼 때, 인류학자들이 연구하는 그 어떤 사회도 진정으로 원시 사회라고 불릴만한 것은 없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이제는 극복되어진 오래된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원시적 사고방식은 진보라는 관념의 부산물에 불과한 직선적 역사관이 낳은 개념 중 하나이다. 그러나 정신과 의사들이 신경증의 발생과 신화의 발생 사이에서 유사성을 발견하고, 프레이저가 현대인들 속에 지속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마법적 믿음에 대해 지적한 것처럼 원시적 사고방식은 도처에 발견된다. 다시 말해서, 원시 사회 즉, 마법 과 현대 사회는 논리적 합리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참여 행위로 세계를 이해한다는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의식이나 제의의 주체가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성스러움을 자아내는 본질은 인간이 아니라 사회 제도라고 본다. 인간은 변하지 않는 존재이고, 변하는 것은 오직 사회 제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창조한 제도 및 대상과 분리될 수 없다.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시켜주는 인간만의 존재 방식은 변화에 있다. 오르테가 이 가셋식의 표현을 빌리면, 인간은 실체가 결여된, 비실체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신성함의 세계는 인간을 배제한 사회 제도만으로 구성되는 것도 아니요, 제도와 절연된 인간만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양쪽 다 그것만으로는 신성한 것이 되기에 불충분하다. 우리는 신성함을, 우리들 자신이 그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하나의 전체적인 현상으로 포용해야 할 것이다.
만일 신성함이 별개의 세계라면, 우리가 그곳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은 키에르케고르가 부른 ‘도약’ 이나 스페인어식으로 말하자면 ‘치명적 도약’ 을 통해서일 것이다. 7세기경의 중국 선사 혜능은 불교의 핵심적 체험을 이렇게 설명한다.
마하반야바라밀다는 인도 산스크리트 용어인데, 중국어로 옮기자면 큰-지혜-피안-도달의 뜻이다. (……) 우리가 외부 세계를 버리면, 흐르는 물과 같이 변화무쌍한 생사의 세계를 초월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바라밀다 - 피안에 이름이다.
모든 의례들은 우리를 변화시켜 타자 로 만드는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 피안의 경험인 치명적 도약은 생사의 경험을 통해 - 새 생명이 태아로서는 죽고 이 세상에서는 살아서 그 탄생을 반복하는 것처럼 - 본성의 변화를 수반한다. 이때는 반드시 바람 즉, 외부의 힘이 개입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도약의 경험은 자신의 의지가 거의 개입되지 않거나 아니면 매우 역설적으로 개입되는데, 이때 자아의 의지는 어떤 다른 힘과 절묘하게 결합되는 것이다.
신성과 마주치면, 우리는 진정으로 다른 세계에 있게 된다. 우리가 신적인 것 앞에 섰을 때도 텅 빔이나 충만한 세계로 향하는 도약과 유사한 이중적 감정이 생긴다. 케베도가 순교자 로렌초의 열락을 묘사한 소네트를 살펴보면, 석쇠 위에서 불타는 로렌초는 그것을 즐기고, 오히려 로렌초를 고문하던 폭군은 로렌초를 통해 불타며 고통을 겪는다. 그는 이 소네트에서 패배가 영광으로 변하는 것을 보면서 타락한 군주는 타들어가고 있다.고 노래한다. 신적인 것, 성의 체험, 신성한 시간은 교감의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치명적 도약은 우리를 초자연적인 것과 맞닥뜨리게 하는데 이것은 모든 종교적 경험의 출발점이다.
초자연적인 것은 먼저 근원적인 낯설음의 느낌으로 나타난다. 그 낯설음은, 현실과 존재를 인정하는 순간에 대상을 다른 것으로 변화시킨다. 힌두교 성지인 무트라의 줌마 강가에서 거행되는 크리슈나를 경배하는 작은 의식에서 보았던 신에 대한 열광과 일상성의 혼재는 모든 제의의 이중적 성격을 말해 준다. 각각은 모두 자기이며 동시에 자기가 아니다. 낯설음이란, 일상적인 현실이 갑자기 처음 보는 듯한 것으로 뒤바뀌는 현상 앞에서 놀라는 것이고, 스스로의 적나라한 실상을 보고 놀라는 것이며, 일상 속의 자신, 즉 자기 존재의 정체성에 대해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그 무엇 앞에서 놀라는 것이다. 초자연적인 것의 체험은 곧 타자의 체험이다. 루돌프 오토는 타자의 출현은 일종의 가공스러운 신비, 우리를 전율하게 하는 신비의 형태로 다가온다고 했다. 우리는 미지의 것 앞에서 공포와 두려움만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타자성을 경험할 때의 가장 순수하고 원초적인 형태는 낯설음, 망연자실, 숨이 멈출 듯한 놀라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