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어학 종교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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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종교 개혁
종교개혁[Reformation] :16∼17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그리스도 교회의 혁신운동
1. 종교개혁의 의의
우리는 흔히 종교의 역사라 하면 회심의 역사가 대부분이라고 할 정도로 회심이 그 종교를 크게 부흥시키는 역할을 하게 되는 예들이 많이 있다. 기독교도 그런 부분에서는 다른 여타 종교와 마찬가지로 뜻을 같이 하게 된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과 모세도 회심으로서 새로운 시작을 했고 사도 바울도 기독교를 무척 탄압하다가 어느 순간 회심으로서 기독교 자체를 누구보다 더 신봉하게 되었다. 이런 여러 사람들만큼 종교 개혁도 회심의 마음이 있었던 이들에게 중세부터 근대까지 계속적으로 누군가에 의해 제기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개혁도 시대를 잘못 만나거나 혹은 그런 주장들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면 그냥 시대 속에 묻혀 버리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종교개혁 하면 루터와 칼빈을 먼저 떠올리게 되는데 이는 이 두 명이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두 명의 종교개혁이 없었다면 뒤에 있을 각 나라의 혁명들(프랑스 혁명, 미국의 건국 등)이 일어날 수 있을지는 의문일 정도로, 다시 말해 근대로 시대가 넘어 올수 있었느냐 라는 질문에도 이 두 명의 종교개혁이 차지하는 의미는 과히 크지 않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러면 종교개혁은 과연 근대 세계를 창출할 힘이 있었는가 혹은 아니었는가? 라는 질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뒤에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먼저 종교개혁은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문예상의 르네상스, 서북 유럽에서 일어난 정치적 르네상스를 배경으로 해서 발생한 마지막 단계의 르네상스라는 위치를 가진다. 이탈리아의 휴머니즘 운동은 서북유럽의 기독교적 휴머니즘으로 발전하여 전통 가톨릭의 교황권 체제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종교개혁의 이념적 근거를 마련해 주었고, 거기에서 대두된 민족주의 및 군주권의 확대는 종교개혁의 현실적인 힘을 제공하였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은 르네상스 운동의 종결적인 의미를 지니며 동시에 르네상스적 군주권을 절대주의 군주체제로 전환시키는데 있어 효모로서의 역할을 담당한다. 근대세계의 새로운 국제질서를 정립하는데 있어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2. 종교개혁의 발단 배경
“교황님은 로마 황제도 아닌데 마치 옛날 황제처럼 돈을 쓴다고 사람들은 수군거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까도 말하지 않았나. 나는 로마에서 돈 쓰는 법을 배웠다고. 그리고 종교란 것은 은행 따위와는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돈을 모으기에 적당해..... 하지만 이런 일도 계속되지는 않을 거야.” “ 그 독일 수도사 얘기를 들으셨군요.” “루터 말인가? 아무래도 수입이 줄어들지 않을까. 그게 걱정이야.....” [신의 대리인] 중에서
위의 내용은 일본의 역사가이자 작가인 시오노 나나미가 쓴 신의 대리인에 나오는 ‘16세기 초엽의 로마 풍경’의 한 장면이다. 당시 로마에서 화려한 르네상스 예술을 견인하던 교황에게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메디치 은행이 파산한 상태에서 교황이 기댈 것은 순박한 신자들뿐 이었다. 짧은 기간이었으나 그의 재임 중 르네상스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그리고 라파엘로는 교황청을 유럽에서 가장 화려한 궁정으로 만들기 위해 함께 창작에 열중하였다. 이를 위해 교황은 갖은 방법(면죄부, 교직의 매매)을 다해 돈을 끌어 모았고, 그것을 탕진하였다. 또한 이 당시의 고위 성직자나 하위 성직자 역시 부패하였다. 사제의 혼외관계는 너무나 당연시 되어있었고 수도원과 교회는 이러한 귀족 자제들의 부양기관이 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교회는 성직자들의 경제적인 이윤도구가 될 위험에 처했다. 이것에 분개하여 일어난 사람이 루터였다. 그러나 르네상스 건축과 예술에 심취한 교황의 눈에 루터는 인간과 예술의 위대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음울한 독일 민족의 일개 수도사일 뿐이었다. 그의 종교개혁 운동은 그 이전의 개혁운동과 마찬가지로 공연히 요란만 떨다 소멸해 벌이는 작은 ‘소란’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 작은 ‘소란’이 통일된 기독교 세계를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 빠뜨린 대사건이 될 줄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킬 당시의 교황 레오 10세는 피렌체 출신으로 메디치가의 학문과 예술에 대한 열정을 바티칸에 끌어 일하는 사제를 임명했고, 그는 죽은 기부자의 영혼 구원을 위해서 소위 침묵미사를 드렸다. 제단에서 일하는 사람은 종종 신학수업을 받지 않은 채 사제가 되었고, 미사를 올리며 성례를 집행했다. 사제로서 성직록을 받는 사람은 적은 돈을 주고 제단에서 일하는 사람을 고용하여 대행케 하는 일도 빈번하였다. 여러 방식으로 고안해 낸 세금과 기부금, 그리고 무엇보다 면죄부는 비어 있는 교황청의 금고를 채우는 수단이 되었다. 돈을 끌어 모으려는 교황의 뻔뻔스런 요구는 많은 민중들의 원망이 되었고 루터 이전에도 많은 개혁을 외쳤지만 그것은 그냥 울림 소리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이렇듯 종교 개혁이란 것이 어느 시점에서 갑자기 생겨 난 것이 아니라 중세부터 계속적으로 이어져 왔다는 걸 알 수 있다.
아무튼간 교황의 이런 착취에 가장 큰 피해자였던 민족은 독일 민족이었다. 그래서 독일 민족의 불만들을 문서로 작성해서 제국회의 때마다 거듭 제출하였으나 교황청에 의해 그냥 묻혀 왔던 것이 지금껏 사실이었다. 이로 인해 독일 민족의 불만은 점차 불씨의 연료가 되어 일개 수도사인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에 큰 변혁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정치적인 상황은 종교개혁의 전개와 확장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그때 황제는 칼 5세였는데 이 황제는 그다지 중앙집권적 성향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종교개혁이 처음 빛을 보게 할 수 있었던 이유였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작센 선제후의 힘이 보호해 주었기에 루터가 그나마 안심하고 종교개혁의 뜻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중세는 하나의 국제적인 국가였다고 할 수 있다. 교회가 하나의 국가로서의 기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를 떠나서는 국가를 상상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중세 말, 국가에 대한 근대적 개념이 발달하자 영국, 프랑스, 에스파니아 등 서유럽 국가들은 인종 언어 역사적 전통을 공유하는 민족적 연대감을 기초로 왕권의 확립을 가져왔고 이런 양상은 각 국가들이 뭉치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민족주의는 왕권과 교황권의 대립, 갈등을 초래하였고 이것이 교황권을 실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써 교회의 대분열은 조금씩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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