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입문 광개토 대왕의 영토 확장

 1  국사입문 광개토 대왕의 영토 확장-1
 2  국사입문 광개토 대왕의 영토 확장-2
 3  국사입문 광개토 대왕의 영토 확장-3
 4  국사입문 광개토 대왕의 영토 확장-4
 5  국사입문 광개토 대왕의 영토 확장-5
 6  국사입문 광개토 대왕의 영토 확장-6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국사입문 광개토 대왕의 영토 확장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광 개 토 태 왕 의 영 토 확 장
목차
1. ‘대왕’이 아니라 ‘태왕’이 맞다!
2. 광개토태왕 재위기간에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
3. 광개토태왕릉비
4. 광개토태왕의 주변국
5. 광개토태왕의 정복은 어디까지 였는가정벌순서
6. 광개토태왕 때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하지 못한 이유
1. 대왕이 아니라 태왕이 맞다!
고구려 19대 왕으로 22년 동안 고구려를 통치한 광개토태왕을 부르는 호칭은 나라나 학자마다 다르다. 일본이나 중국 학자들은 호태왕(好太王)이라고 부른다. 우리 나라와 일본 학자들 사이에서 자주 쓰이는 것으로 광개토왕(廣開土王)이라는 표현도 있다. 국내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쓰이는 것은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한국인들은 호태왕이 누구인지 모르고, 중국인들은 광개토왕이 누구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정확한 표현일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모두 틀린 것은 아니다. 광개토태왕비문에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긴 시호가 나온다. 여기서 태왕릉이 있던 땅 이름인 국강상을 제하고 나면 공통된 호칭이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이다. 태왕릉에서 나온 벽돌에도 태왕이라는 칭호가 나오고, 중원고구려비에도 분명히 같은 호칭을 사용했다. 그러나 대왕(大王)이라는 칭호는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를 지은 김부식은 광개토태왕비에 대한 연구를 못하고 고구려사의 많은 부분을 중국 사서를 통해 쓸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광개토왕이라고밖에 쓰지 못했다. 그 뒤 근대 사가들이 우리 역사에서 가장 넓은 강역을 이룬 왕을 왕이라고만 붙일 수 없어 근거는 없지만 그냥 대왕이라고 붙였을 뿐이다.
중국은 건국 신화인 3황 5제에서 황제를 따내 최고 군주의 명칭으로 썼다. 진나라 이전에는 군주를 제(帝)라고 칭하지 않고 왕이라고 했다. 그러다가 진시황이 처음으로 황제라는 칭호를 쓰기 위해 천황이라고 했다. 그리고 고구려는 태왕이라고 불렀다.
이 태왕이라는 칭호는 연호(年號) 사용이나 하늘에 제사 지내는 천제(天祭) 등과 같이 고구려가 당시 동아시아에서 독자적인 천하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국가를 운영했다는 것을 분명히 해 주는 기록들이다. 이런 기록을 제대로 살려 고구려의 진면목을 밝히는 것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임무이고, 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후손의 도리이다. 앞으로 교과서도 바뀌어야 할 것이다. 광개토대왕이 아니라 광개토태왕이 맞는 표현이다.
2. 광개토태왕 재위기간에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
광개토태왕(19대)의 휘는 담덕(談德)이며, 고국양왕(故國壤王)의 아들이니, 어려서부터 체격이 웅위(雄偉)하고 뜻이 고상(高尙)하였다. 고국양왕 3년에 태자가 되고 9년(8년)에 고국양왕이 돌아가자 태자가 즉위하였다.
-7월에 (왕이) 남으로 백제를 쳐서 10성(城)을 빼앗았다.
9월에 북으로 거란을 쳐서 남녀 500명을 사로잡고, 또 본국의 함몰민구(陷沒民口) 1만 명을 불러서 권유하여 이끌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