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마 유치환(靑馬 柳致環) - 유치환의 생애 & 유치환의 작품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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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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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청마 유치환(靑馬 柳致環)
1908.7.14~1967.2.13
그는 그 당시 한국 현대시의 맥락으로부터 멀리 벗어나 자신만의 이야기를 하는 시인이라 볼 수 있다. 그의 두 번째 시집 『생명의 서』의 에서 “나는 시인이 아닙니다. 만약 나를 시인으로 친다면 그것은 분류학자의 독단과 취미에 맡길 수밖에 없지요. 어찌 사슴이 되려고 애써 풀잎을 씹고 있겠습니까?”라고 했고, 실제 그의 시는 세계와 자아의 문제, 도시문명에 대한 비판, 자연, 인간의 일 등 다양한 주제와 소재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청마 스스로가 시인이 아니기를 바란 만큼 그의 시는 순수시파나 모더니즘파의 율격이나 이미지, 상징 등에 부심하지 않았으므로 그의 시에 대한 평가는 자연 시 정신 문제 『한국현대작가론』, 민봉군 외, 민지사, 2007, p.249
에로 기울어있다.
-유치환의 생애
유치환은 1908년 한의(韓醫)였던 유준수(柳焌秀)의 8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장남은 극작가인 유치진이다. 유치환은 외가에서 태어나 11세 때까지 서당을 다니며 한문을 배웠다. 어린 시절의 그는 말이 통 없는 소년이었다. 통영보통학교 4학년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야마 중학교에 1922년 입학하였다. 도요야마중학 4학년 때 부친의 사업이 기울자 그는 귀국하여 동래고보 5학년에 편입한다. 1928년 연희 전문을 중퇴하고 한 살 연하의 권재순과 결혼한다. 그 당시 일본으로 건너가 사진학원에 다니는데, 그 당시 일본의 아나키스트들과 정지용의 시에 깊은 영향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다.
청마는 1931년 『문예월간』에 이라는 시를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나온다. 1937년 부산에서 문예동인지 『생리』를 주재하여 5집까지 간행하고, 1939년 첫 시집 『청마시초(靑馬詩抄)』(1939)를 발간한다. 여기에 , , 등 55편이 수록되어 있다.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0년 봄, 청마는 가족을 이끌고 농장 경영을 하기위해 북만주 연수현으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궁핍하고 힘들었던 시절을 보낸다. 이 때 만주의 황량한 광야를 배경으로 한 허무의식과 가열한 생의 의지를 쓴 시 , , 등이 제2시집 『생명의 서』(1947)에 수록되어 있다.
1945년 6월 고향 통영으로 귀향을 하게 된다. 1945년 9월 15일, 청마가 대표가 되어 김춘수 등과 함께 계몽적 예술운동단체인 ‘통영문화협회’를 결성하게 된다.
청년문학가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민족문학운동을 전개하였고, 6·25 동란 중에는 문인구국대의 일원으로 보병3사단에 종군하기도 하였다. 이 때 『보병과 더불어』(1951) 시집을 발간한다.
1953년부터 다시 통영으로 돌아와 이후에는 줄곧 교직으로 일관하였다. 1967년 2월, 부산남여자 상업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 교통사고를 겪고 병원으로 운반도중 영면하였다.
또한 청마는, 그의 나이 38에 만난 시조 시인 정운 이영도(李永道)와 플라토닉 러브를 나눈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근 20년 동안 약 5000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정신적으로 그녀와 사랑을 나누었는데 이는 서간집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1967)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