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무라카미 하루키의 스푸트니크의 연인 를 읽고 스푸트니크의 연인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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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무라카미 하루키의 스푸트니크의 연인 를 읽고 스푸트니크의 연인 줄거리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 무라카미 하루키의 "스푸트니크의 연인”를 읽고 >
22살의 봄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다. 드넓은 평원을 곧장 달려가는 회오리바람 같은 격렬한 사랑이었다.『스푸트니크의 연인』은 이처럼 독백하는 젊은 여성 스미레의 이야기다. 국내에서도 꾸준히 읽히고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표작 『노르웨이의 숲』과 같은 전형적 연애 소설이지만, 이번엔 특이하게도 레즈비언의 사랑 이야기다.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난 남들처럼 독서를 많이 하는 편은 아니지만, 가끔 서점을 들를 때면 새로 출시된 책에 관심을 보이는 정도였다. 이 책도 아마 서점을 들르다 우연히 내 눈에 띄게 된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대학 입학 후 계속 되어 온 무의식적 삶에 딱 이 책이 떠올랐다. 그리고 거기에는, 왠지 무라카미 하루키라면 내게 생각할 거리를 줄 것이라는 기대도 한 몫을 톡톡히 했다. 역시 하루키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스미레의 동성을 향한 사랑은 그 당시 핫 이슈로 떠오르고 있던 홍석천의 coming out과 우연한 일치를 보이고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흥밋거리가 될 수 있었을 듯 싶다. 그러나 정말 나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것은 자아의 상실과 분열 그리고 회복이었다. 그 당시의 내가 그러했기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최근 작품인 이 소설, 『스푸트니크의 연인』에서 나는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두 가지의 코드를 찾을 수 있었다. 하나는 스물 두 살 소설가 지망생인 스미레와 17살 연상의 한국계 유부녀뮤와의 동성애이고, 다른 하나는 스미레와 뮤를 관찰하는 나의 상실과 회복이다. 이러한 코드를 보여주기 위해 하루키는 스푸트니크 위성이라는 중요한 상징을 사용한다. 스푸트니크는 57년 10월 3일 소련이 세계 최초로 쏘아 올린 우주선 이름이다. 지구를 96분 12초마다 한 바퀴 돌았던 우주선처럼 이 소설의 주인공 나는 연인의 주위를 쉼 없이 맴돈다. 그런데 그 연인은 나보다 17살 연상의 유부녀인뮤 에게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는 맹목적 사랑에 빠졌으면서도 그 사랑을 경계하는 동성 연인들 사이의 미묘한 심리 상태가 잘 그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스푸트니크의 상징성은 하루키가 보여주는 소설 구도에서 역시 찾아볼 수 있다. 위성의 반복적인 순환에서 오는 피로는, 나가 자신의 제자의 어머니와의 불륜을 청산하거나, 스미레의 귀환을 맞이하는 것으로 환치되고 있다. 새로운 세계와의 조우, 즉 하루키의 키워드 중 하나인 상실에서 희망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흔히 이 소설을 동성애에 대한 소설로 오인하고 있지만 사실 하루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타인화된 자아의 정체성으로 보인다. 마치 스푸트니크 위성처럼 세 사람의 관계는 일정한 간격과 궤도를 유지하고 있다. 뮤를 사랑하는 스미레, 또는 스미레를 사랑하면서도 일정한 간격을 둘 수밖에 없는 나의 화법은 아슬아슬하게 소설 구도의 언저리를 맴돈다. 그것은 후반부에 이르러 스미레의 꿈과 뮤의 분열로 비로소 드러난다. 스미레가나에게 질문하는 기호와 상징의 차이, 그리고 질문에 대한나의 대답은스미레의 실종과 이어지며 정체성을 찾아가는 인간의 궤적을 그리고 있는 셈이다.
하루키는 이 부분에서 자기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하나의 장을 소비해 가면서까지 무리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지나친 친절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독자들은 이야기를 읽고 싶은 것이지 작가의 해설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에는 하루키가 지닌 매력적인 특성이 여전히 녹아있다. 하루키 특유의 간결하면서 긴 여운이 남는 문체와 무한대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사랑의 형태 묘사가 그것이다. 또한, 허무, 고독,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주의와, 보수적이고 평이하지만 안온한 일상성으로의 회귀 역시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그런 관계 속을 들여다 볼 수는 있어도 참여할 수는 없다. 완벽하게 공개되어 있는 전지적 시점을 유지하면서도 실제에 있어서는 그들의 관계에서 완벽하게 배제될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루키가 제안하고 있는 문화적 기호인 듯 하다.
그 사랑은 힘차게 대양을 뒤집었다. 앙코르와트 사원을 전복하고, 인도의 삼림에 살고 있는 일군의 호랑이들을 태워버렸다. 페르시아 사막의 모래바람으로 이국적 성벽도시를 채워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