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문 - 블랙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희망의 언어 [내 생애 가장 눈부신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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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희망의 언어 [내 생애 가장 눈부신 기적]
소리는 침묵이 되고, 빛은 어둠이 되던 시절, 세상이 온통 어둠뿐이었던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8살 소녀 ‘미셸’... 규칙도 질서도 없던 ‘미셸’에게 세상과 소통하게 해 줄 마법사 ‘사하이’선생님이 나타나고, 그의 굳은 믿음과 노력 끝에 그녀에게도 새로운 인생이 열리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알츠하이머에 걸려 ‘미셸’조차 알아볼 수 없게 된 ‘사하이’는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조용히 떠나고, ‘미셸’은 ‘사하이’를 애타게 찾는 한편, 그의 가르침대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한 소녀의 희망의 메시지가 이 영화의 줄거리이다.
사실 난 이제 태어난지 한 달 넘은 아기 엄마라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엄두도 내지 못했고 감상문보다는 스크랩평이 더 부담이 적을것 같아 ‘Black’이라는 영화를 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남편이 영화를 어디서 구했는지 컴퓨터로 보라고 영화를 모니터로 옮겨 놓은 순간 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보나마나 헬렌켈러와 설리반 선생님 이야기 같은 뻔한 영화라 생각한 내가 부끄럽게 생각될 정도로 눈물을 많이 흘렸으니까 말이다. ‘남편이랑 같이 보았으면 좋았을 텐데’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이 영화를 감상하고 보고서를 쓰는 시각이 새벽이어서 어쩔 수 없이 나 혼자 보아야 했다. 아기가 새벽에 통잠을 자니 보고서를 쓰려면 날을 새야 하는 각오를 해야 한다.
난 그리스도인으로 이 영화를 볼 때 그냥 볼 수 없었던 것이 사하이 선생님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젠가 몸을 불사르며 돌아가신 투사들도 있었지만 성경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듯이 자신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 된다고 했던가? 물론 불신투사들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문득 사랑이 아닌 자포자기나 분노로 삶을 마감한다면 그 삶이 많이 아까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아침 TV동화에서 사업이 망해 도망다닌 신세에서 공부하는 부인이 시각장애인을 위해 글을 타이핑해 계속 보내주며 봉사하며 삶의 의욕을 찾았다는 이야기에서 공감할 수 있었듯이 우리네 삶도 더불어 사는 삶이라 남의 삶을 아름답게 가꾸고 일구어 주는 삶을 산다면, 사하이 선생님 같은 진한 감명화는 그릴 수 없지만 묽은 수채화같은 잔잔한 감동이 스며있는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나폴레옹이 내 생애에는 불가능이 없다고 했던가? 하지만 그는 이 영화의 주인공들과는 달리 불가능한 삶을 살았다. 그 이유는 사랑이 인생의 목표에서 빠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 ‘Black’이라는 영화의 제목은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의 삶을 나타내지만 난 이제목이 나타내는 검은색이 사랑을 의미하는 ‘진한색’을 의미한다고 감히 명명하고 싶다. (막9 ; 23 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수있거든이 무슨말이냐 믿는자에게는 능치못할일이 없느니라’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안에서의 믿음을 강조하신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누군가를 강하게 믿고 소망하게 된다. 그 이유는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하셨나 보다.
성경 말씀을 더 인용하자면 고린도후서(1:3-11)에 있는 의 말씀에서 바울이 말하기를, 하나님이 그들에게 고통을 허락하시고 하나님의 위로를 주시는 이유는, 고린도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슬픔을 공감하고 그들을 위로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이라 한다. 이 영화는 사랑 안에서 불가능은 없다는 희망과 소망, 믿으면 할수있다는 위로의 메시지를 준다. 분명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을 감동으로 몰아넣고 삶에 새로운 힘과 에너지를 공급해 주는 것만은 틀림없다.
또, (요한복음 9장 1-7절)에서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라는 말씀도 감사와 위로의 메시지이다. 우리는 하나님 한 분 말고는 장애의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다만 라는 말씀처럼 때가 되면 희미하지 않고 뚜렷이 알게 될 것이다.
언젠가 교회에서 하모니카 공연으로 장애인 복지관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한 관계자가 공연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정신지체장애인들이 불쌍하다는 이야기를 해서 이렇게 덧붙인 적이 있다. 요한복음의 예수께서 “당신들이 차라리 소경이었더라면 당신들에게 죄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들은 지금 우리는 본다 고 하니 당신들의 죄는 그대로 남습니다."라고 말씀하시듯이 장애가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더 불행할 수 있다고 답변한 기억이 난다.
책에서 본 실제 이야기로 한 시각장애인이 개안 수술 성공 후 자살한 이야기인데, 눈으로 보지 못하고 아내의 목소리로 세상을 들었을 때(?)는 그렇게 아름다웠던 세상이 눈으로 보았을 때는 기대완 달리 너무도 추해서 정신적으로 감당하지 못해 수술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소연하다가 생을 마감한 중년 남자의 이야기가 있다. 사실 시각장애인이 시력을 회복하고 아내의 얼굴을 다른 사람과 구별해내는 데는 통상 넉 달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한다. 시각장애인이 시력을 회복하면 가장 먼저 보인 반응은 엄청난 당혹감이라고 한다. 그들에겐 엄청난 피나는 훈련이 필요하고 상상을 초월하는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그들이 세상을 인식했던 통로가 폐쇄되고, 전혀 새로운 차원의 길에 들어서야 한다. 훈련 가운데 한 여성은 이렇게 절규했다고 한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예전으로 돌아가는 편이 더 행복하겠어요.”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