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앙 수용의 정치사회적 측면 - 성호 이익을 실마리 삼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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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신앙 수용의 정치사회적 측면 - 성호 이익을 실마리 삼아 -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가톨릭 신앙 수용의 정치사회적 측면
- 성호 이익을 실마리 삼아 -
가톨릭 신앙 수용은 조선 후기 서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계층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의 문인들로서, 권철신(權哲身), 권일신(權日身), 이기양(李基讓), 정약용(丁若鏞), 정약전(丁若銓) 및 이벽(李蘗) 등과 같은 일단의 학인들을 포용하고 있던 성호 좌파(左派)로 분류되는 집단에서였다. 조광, “조선후기 서학의 수용층과 수용논리”, 『역사비평』, 27호(1994, 여름), 283.
본 발제에서는 이익을 실마리 삼아 그가 살았던 시대적 상황, 그가 속해있던 정치적 배경, 그의 학문적 입장 등을 살펴봄으로써 가톨릭 신앙 수용의 정치사회적 측면을 이해할 수 있는 단면을 찾아보고자 한다.
1. 이익의 가계(家系)적 배경 - 붕당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이익의 아버지는 이하진(李夏鎭)으로서 숙종대 초반 정국에서 허목(許穆), 윤휴(尹)와 함께 청남계로 활동했다. 특히 윤휴와 긴밀한 교유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양 가문은 광해군대 이래 정치적으로 북인계로서 중앙정계에서 활동했다. 이하진의 조부인 이상의(李尙毅)는 소북계로서 유희분(柳希奮), 남이공(南以恭)과 함께 광해군대 대북정권에 적극 참여했다. 양 가문은 서경덕(徐敬德)의 화담학파(花潭學派)와도 일정한 학문적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다. 또한 이익의 가계는 이수광(李光) 가문과도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수광은 이하진과 교유관계에 있던 윤휴의 스승, 이민구의 부친이기도 했고, 이상의는 이수광과 더불어 주청사(奏請使)로서 중국에 다녀오기도 했다. 이수광 가문과의 관계는 이익 당대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이익은 이수광의 5대손인 계주(啓)의 아들 극성(克誠)을 사위로 맞아들였다. 원재린, 『조선후기 星湖學派의 학문연구』, (서울: 혜안, 2003), 25-26.
여기서 주목해 볼 수 있는 부분은 먼저 이익의 가계가 북인계과 연관된다는 점이다. 조선초기 사대부는 일부세력만이 공신으로 왕정에 참여했고, 정몽주 등의 절의파 학맥을 계승한 사대부는 상당 기간 향촌사회에 은거해왔다. 그러다 절의파 사대부들이 15세기 말 성종대에 이르러서 ‘사림’이라는 정치세력으로 부상, 왕정에 참여했고, 4대 사화의 연속적인 박해를 받으며 이념집단으로 결속성장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16세기 말 선조대부터 왕정운영 전반을 주도하는 지배적인 정치세력이 되었다. 강광식, “붕당정치와 조선조 유교정치체제의 지배구조 변동양상 - 지배연합의 변동양상을 중심으로”, 『OUGHTOPIA』, Vol.24, No.1 (Summer 2009), 115-116.
이 후 사림은 이념과 명분, 학문적 견해, 지연, 인연 등에 따라 내적으로 분화를 겪게 되는데 그 시작이 선조 8년(1575)에 이르러 일어난 동인과 서인으로의 분파다. 발단은 삼사(三司)의 인사권을 쥔 이조전랑직을 둘러싸고 일어난 김효원과 심의겸의 대립이었다. 당시 김효원 지지자들은 동인, 심의겸 지지자들은 서인을 이루었다.
이 때 동인 계열의 주축을 이루고 있던 신진사류는 영남 출신이 대부분이었으며, 그들은 영남 우도의 남명 조식(曺植)과 영남 좌도에 포진된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들이었다. 서인 계열은 기호 출신의 문인들이었다. 이이(李珥)도 서인에 참여했다. 이러한 붕당정치는 선조 22년(1589) ‘정여립(鄭汝立) 사건’을 계기로 일대 변동을 겪게 된다.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파된 것이다. 강광식, “붕당정치와 조선조 유교정치체제의 지배구조 변동양상 - 지배연합의 변동양상을 중심으로”, 『OUGHTOPIA』, Vol.24, No.1 (Summer 2009), 115-116. 서인들은 이이 사후, 세력이 약화되던 상황에서 역모사가 일어나자 이를 최대한 활용하여 북인계 주요 인물들을 처벌하고 제거하려 하였다. 이 때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인물이 정철이었다. 이 사건으로 북인계의 주된 세력이 제거되었다. 서인들의 역모사 처리과정은 북인계의 주요 인물을 처벌(이발 일문이 몰살당하고, 최영경은 장살되었으며, 정인홍, 홍가신은 삭탈관직 당했으며, 한백겸은 회령으로 유배되었다)하여 북인의 정치력을 붕괴시키는 방향으로 이루어지지만, 한편으로는 북인 내부에 존재했던 비주자학적 사상을 척결하는 사상정화 작업의 의미도 있었다. 특히 정여립은 사상적으로도 대단한 흠이 있는 인물로 평가받고 있었다. (정호훈, 『朝鮮後騎 政治思想 硏究 -17세기 北人系 南人을 중심으로』, (서울: 혜안, 2004), 31-36.) 그러나 정철은 세자건저 문제로 다시 역공을 맞았다. 이 때 서인에 대한 동인의 숙청 정도를 놓고 동인이 두 파로 나뉘게 된다. 온건파는 남인으로, 강경파는 북인이 되었다. (남경태, 『종횡무진 한국사 - 하』, (서울: 그린비, 2001), 142)
대체로 남인은 이황에게 직접 배웠거나 아니면 그 영향을 크게 받은 인물들이었고, 북인에 속한 인물들은 서경덕, 조식의 학맥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선조 32년(1599) 경에는 북인은 대북과 소북으로 분화했다. 임진왜란 때 북인은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정국의 주도권을 다시 장악할 수 있었다. 전쟁 시기 이들은 주전론(主戰論)을 견지하고 애국의 작풍을 크게 강조했다. 반면 남인은 화의(和議)를 통해 전쟁을 종결하려는 성향을 보였다. 이는 북인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게 된다. 북인은 남인을 배제하고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지만 홍여순을 대사헌으로 천거하는 문제를 놓고 다시 소북과 대북으로 분화했다. (정호훈, 『朝鮮後騎 政治思想 硏究 -17세기 北人系 南人을 중심으로』, 101-102.)
양 세력은 북인으로서의 동질성을 공유하면서도 주요한 국면에서는 상호 대립하였다. 소북은 남인에 대해 우호적이었으며 대북은 서인과 남인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하였다. 북인은 남인과 선을 그으며 그 당파적, 학파적 색채를 뚜렷이 갖추어 나갔다. 북인들은 유기론(唯氣論)의 세계관에 큰 영향을 받았으며 그 사유에 기초하여 정치사회 운영론을 모색하려 했다. 북인들이 크게 영향 받았던 사상이 갖는 특성은 주자학을 상대화하며, 주자학과는 다른 정치론을 모색하게 하는 근거이기도 했다. 따라서 북인의 사고는 치국, 치세의 기본적인 방침과 지향을 절대적인 도덕명분, 절대적 천리론(天理論)을 근거로 구하고자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유기론적 세계관에서 이들은 엄격한 도덕주의, ‘도학(道學)’의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로움을 얻고 있었다. 경제적인 실리, 상업이익을 추구하는 문제에 대해 이들이 별다른 거부감 없이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그 한 모습이었다. 정호훈, 『朝鮮後騎 政治思想 硏究 -17세기 北人系 南人을 중심으로』, 3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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