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대한 고찰, 사랑에 대한 답은 너에게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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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사랑에 대한 고찰, 사랑에 대한 답은 너에게 있으므로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Subject 사랑에 대한 고찰
(사랑에 대한 답은 너에게 있으므로)
Ⅰ. 인간이라면 목매는 그것, 사랑
1. 괴벨스의 사랑과 예수의 사랑
히틀러 통치 시절을 경험한 유대인들을 인터뷰한 뒤, 그들이 일상적으로 접했던 테러와 대량학살을 파헤친 책 『우리가 알았던 것(What we knew)』에서 우리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남성과 여성이 삶을 회고하는 방식이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악명 높았던 게슈타포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때, 남성의 경우에는 게슈타포를 나치 혹은 제3제국과 동일시했다. 그러므로 면접자가 독일인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한 남성 피면접자는 “그들이 내 친구들을 다 죽였는데, 내가 왜 그들을 동정해야만 하겠는가.”라고 반문한다.
반면 한 여성은 자신을 체포한 게슈타포를 두고 “그가 게슈타포만 아니었더라면 유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를 보면서 이 여성은 “선술집의 매일 앉는 의자에 둘러앉아 있는 그를 상상할 수도 있었다.”고 말하면서 “그런 사람이 어떻게 그 같은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었는지.”가 자신의 의문이라고 대답했다. 이 부분은 예루살렘에서 열린 나치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방청하던 해나 아렌트의 복잡한 심사와 공명한다. 즉 이 두 사람은 남성들과 달리 그들도 인간이라는 관점으로 게슈타포와 아이히만에게 접근하기 때문에 마음의 갈등을 일으키는 셈이다.
국내에 출간된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을 읽으면서 소설가 김연수는 위의 여성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고 말했다. 나치즘의 화신이었던 그에게도 열등감으로 가득 찬 학창 시절이 있었고, 가지지 못한 연인과의 삶이 있었다. 이 부조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지만, 여전히 이러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 미스터리다. 예컨대 예수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라고 말할 때, 이때의 사랑은 청년 괴벨스의 사랑과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이 두 개의 감정을 그저 ‘사랑’이라는 같은 단어로 불러도 되는 것일까, 아닐까?
이 막막한 질문 앞에서 다시 면접에 응한 유대인들을 떠올려보자. 남성의 시각에서 보자면 모든 인간은 정치 · 경제 · 사회적 존재다. 개인적인 감정이나 사연, 변명은 불필요하고 사소한 것들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속한 사회나 국가나 민족이다. 아마도 이게 대중 선동의 귀재 괴벨스가 연설의 마지막 5분 동안 하고 싶었던 이야기일 것이며, 모든 정치인이 지금도 하고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삶을 명쾌하게 해석하는 논리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명쾌함이 폭력과 대량학살과 보복의 악순환을 불러온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반면 여성의 방식은 우리를 더 혼란스럽게 만든다. 괴벨스에게도 사랑이 있었으리라고 집작하는 일, 혹은 선술집에 친구들과 앉아 떠들어대는 게슈타포를 상상하는 일은 어쩐지 예수가 말한, 우리의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는 일과 비슷해 보인다. 그 어떤 악인이라도 본디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해 세상사를 이해하고자 하면 결국에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증오도 하나이고 분노도 하나지만, 사랑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게 바로 이 세상을 만든 신의 뜻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계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까닭은 모두 ‘사랑’ 때문이다. 괴벨스의 사랑과 예수의 사랑을 같은 단어로 부르면서 세계는 혼란스러워졌다. 그렇다면 진짜로 사랑, 사랑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2. 많은 철학자들은 사랑을 정의하려고 하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의 역사 이래 많은 학자들이 사랑에 대하여 언급해 왔다. 예를 들어서, 과거 플라톤(Plato)은 “누구를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 속에 있는 미(美)와 선(善)의 진수를 알아보는 것”이라고 했고 성서에서는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준다.”라고 했다. 이후 “사랑은 위안이 아니고, 빛이다.”라고 프랑스의 어떤 철학자는 말했고, “사랑은 마음의 즐거운 특권이다. 사랑은 모든 살아 있는 것의 이유이다.”라고 영국의 저명한 시인은 말했다. “사람들은 사랑에 의하여 살고 있다. 그러나 자기에 대한 사랑은 죽음의 시초이며 신과 만인에 대한 사랑은 삶의 시초이다.”라고 톨스토이는 말했고 심지어 “사랑은 아낌없이 뺏는 것이다.”라고 일본의 아리시마 다케오는 말했다. 하지만 위의 정의를 통해서 우리는 공통적 사랑의 의미를 도출해내기가 참으로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사랑에 대한 정의 중에서 가장 설득력 있다고 여겨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정의를 내린 학자는 에리히 프롬이다.
그는 사랑에 대한 뛰어난 고찰을 담은 저명한 저서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을 다섯 가지 항목으로 정의하였다. 첫 번째, 사랑은 주는 것이고 두 번째, 사랑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며 세 번째, 사랑은 책임이고 네 번째, 사랑은 존경이며 다섯 번째, 사랑은 상대방에 대한 이해이다. 에리히 프롬의 정의는 인간이 태어나서 일반적으로 행하는 사랑이며, 모두에게 공감을 얻을 법한 정의이다. 그러나 에리히 프롬의 정의만 가지고서 사랑을 다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랑은 아낌없이 빼앗는 것이라는 말을 한 아리시마 다케오의 정의를 에리히 프롬의 정의에서는 적어도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고 아리시마 다케오의 정의가 틀렸다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진짜 사랑의 정의는 무엇일까?
3. 진짜 사랑의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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