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종교개혁 [시대적 상황, 헨리8세 교회, 에드워드6세 종교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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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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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영국의 종교개혁
1. 시대적 상황
16세기 당시 잉글랜드는 이미 위클리프 영국의 선구적 종교개혁자로 옥스퍼드대학을 졸업. 모교 신학 교수를 거쳐 국왕 에드워드 3세의 궁정 사제로 서임되자, 신앙과 구원에 관한 최고의 권위는 성서에 있다고 확신하고, 교황권(敎皇權)으로부터의 영국의 정치적 ·종교적 독립을 표방하고 반교황(反敎皇)정책을 취하며 왕자인 랭커스터 공(公)의 협조에 힘입어 교회개혁 운동에 앞장섰다. 교황에 대한 공세(貢稅)를 반대, 특히 교회령 재산에 대해 공격을 가하였다. 1378년 교회분열(敎會分裂)을 계기로 가톨릭의 교리도 비판하고, 이른바 롤라이드(가난한 신부)를 각지에 보내어 민중 속에서 복음을 설교하게 하였다. 1379년 이후에는 성직자의 악덕을 비판하고, 교회의 새크러멘트(sacrament:聖事) 가운데 특히 성찬설(聖餐說)을 성서에 의하여 비판, 참된 복음을 설교하며, 성서의 영역(英譯)사업도 벌이는 등 백수십 편의 저술을 남겼다. 1381년에 W.타일러의 난이 그의 설교에 기인된 것이라 하여, 대학이나 귀족의 지지를 잃고 실의 속에서 은퇴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도 라타워스에서 설교를 계속함으로써 명설교가로 이름을 날리다가 죽었다. 1415년 콘스탄스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단죄되자 그의 유해는 저서와 함께 불태워졌다. 일설에는, 유해는 템스 강물에 던져졌다고도 한다. 그의 주장은 뒤에 J.후스에게 계승되어, 후스전쟁을 일으키게 하였다
와 롤라드들(위클리프의 추종자들) 때문에 종교적인 불안을 겪었고, 정치적으로 장미 전쟁 1455∼85년에 있었던 영국의 봉건귀족인 랭카스터와 요크 두 왕가 사이의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싼 영국의 내란. 랭커스터왕조는 개조(開祖) 헨리 4세가 리처드 2세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것이므로 3대째인 헨리 6세 때 요크공(公) 리처드가 랭커스터왕조 이상으로 왕위계승권이 있다면서 궐기하였으며, 여기에 귀족간의 싸움이 결부되어 내란이 일어났다. 이 내란의 본질은 귀족전쟁이라는 점에 있다. 장미전쟁이라는 이름은 랭커스터가(家)가 붉은 장미, 요크가가 흰 장미를 각각 문장(紋章)으로 삼은 것에서 유래한 것이나, 내란 당시에는 요크가의 흰 장미만이 존재하였다. 내란의 원인은 랭카스터왕조 헨리 6세의 정부가 약체화되었고, 백년전쟁의 종결(1453)에 따른 귀휴병이 추가됨으로써 팽창한 무장호위대를 거느린 대귀족들이 법과 질서를 무시하고 불온한 움직임을 보인 데 있었다. 이들 대귀족은 헨리 6세를 지지하는 파(지도자는 서머셋공)와 요크공(公) 리처드가 이끄는 반국왕파로 나뉘어 대립하였는데, 53년 왕이 정신이상을 일으켰기 때문에 요크공이 섭정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가을에 왕비가 왕자를 출산하고 왕의 병도 낫자, 야심을 가진 왕비 마가렛트는 서머셋공을 섭정에 임명하였다. 이것이 요크공 결기(決起)의 원인이 되어서 싸움이 시작되었다. 55년 5월 세인트올번스 싸움에서 왕이 사로잡혀 요크파가 권력을 잡았으나, 이듬해 왕비의 반격을 받아 패하고 요크공과 조카 워릭백작은 프랑스로 망명하였다. 60년 워릭백작의 활약으로 귀국한 요크공은 왕위를 선언했으나 왕비의 반격으로 패사(敗死)하였다. 61년 요크공의 아들 에드워드가 재기하여 왕비를 격파하고 왕위에 올라 에드워드 4세가 되었다(요크왕조 창시). 워릭백작은 에드워드 4세의 정책에 반대하여, 대륙으로 망명중인 선왕의 왕비 마가렛트와 손잡고 반란을 일으켰지만, 71년 바넛싸움과 튜크스베리싸움에서 에드워드 4세는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왕권은 강화되었으나, 83년 왕위가 어린 왕 에드워드 5세에게 넘어가자, 백부 글로스터공이 왕을 모살(謀殺)하고 리처드 3세를 선언하였다. 그 뒤 랭카스터파의 유일한 왕위계승권자 헨리(튜더家)가 망명중 귀국하여 85년 보즈워스싸움에서 리처드를 패사시켰다. 새로운 왕 헨리 7세는 튜더왕조를 열었고 두 왕가의 내란은 끝이 났다.
을 통해 국민들은 상당한 고통을 경험한 바 있었기 때문에 무엇보다 안정과 질서를 희구하고 있었으며, 이를 이룩하는 최선의 방책은 내부의 분열과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주권적 국가를 보장하고자 하는 새로운 민족주의의 물결이었다. 따라서 영국을 비롯한 스페인, 프랑스 등 새로이 등장한 민족주의 국가들은 교황을 번거로운 외부세력으로 간주하고, 공개적인 충돌이나 마찰은 없었으나 그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잉글랜드의 경우 윌시 추기경의 존재가 잉글랜드교회가 로마로부터 분리되기 전 이미 얼마만큼의 독립을 획득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2. 헨리 8세의 교회
영국교회가 바티칸과 문제가 생긴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것은 국왕 결혼의 무효화 여부였다. 헨리 8세는 이미 사법적, 재정적 문제들은 로마 교회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있었지만, 결혼은 교황의 성례의 일부로 남아 있는 한, 이 문제에 관한 교황의 권한을 전면적으로 부인할 수는 없었다. 헨리 8세의 문제는 정욕이 아니라 왕위 계승에 있었다. 당시 33세였던 헨리와 40세였던 캐더린 사이의 소생이 대부분 사산이나 태어난 지 몇 달만에 죽어갔으며, 여아인 메리만이 유일하게 생존하였다. 그런데 이는 바람직한 후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국가를 안정시켜서 국민의 지지를 받았던 튜더 왕조로서는 왕비가 후사를 낳지 못할 경우 왕조의 안위가 위험스런 지경이었다. 그러나 원래 캐더린은 헨리의 형인 아더의 아내였다. 그런데 결혼 후 반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아더는 사망했고, 이 때문에 지참금 문제로 고민하던 헨리 7세는 헨리 8세와 결혼을 시키게 된 것이다.
이를 가능케 하기 위해 당시의 교황 쥴리우스 2세는 특별한 면책 특권을 발했다. 그런데 헨리는 이러한 허락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주장을 하면서 결혼에 대한 무효화를 주장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클레멘트 7세에게 면책령을 취소시키고 결혼이 처음부터 무효임을 인정해달라고 요구했으며, 교황의 입장에서도 이러한 제안을 전면 거부해버릴 입장도 아니었다. 헨리는 여러 가지 면에서 볼 때 교황이 자기의 요구를 들어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캐더린이 스페인의 왕이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요, 교황을 지배하고 있던 찰스의 숙모였기 때문에 입장이 난처했던 교황은 판결을 미루다가 1529년 교황 법원이 이탈리아의 무더운 여름철에는 개정하지 않으므로 영국에서도 재판을 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대고 7월부터 10월까지 휴정해 버렸다.
헨리는 이 문제를 직접 해결하기로 결심했으나 그로서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잉글랜드 성립이래 초유의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나 국민의 여론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당시 영국은 신자들의 개인적 경건과 반성직자주의가 팽배하고 있었다. 동시에 사제주의와 교황주의에 대한 반감이 비등하였는데, 헨리는 자기가 삼위일체 등 기독교 본질적인 교리들을 건드리지 않는 한, 교황의 권위를 무시하더라도 국민들의 반대를 받지 않을 거라 계산했고, 또한 성직자들의 재산과 수입이 왕이 차지하려 하지 않는 한 그들도 왕의 뜻을 좇으리라 생각했다. 그는 월시 Cardinal Thomas Wolsey : 1471~1530 백정의 아들로 태어나 교회와 옥스퍼드 대학교를 통해 꾸준히 상류사회로 올라갔으며, 프랑스에 적대적인 외교정책을 주창하여 1515년 헨리에 의해 장상(현재의 수상)에 임명되었다. 1518년 교황 레오 10세는 요오크와 캔터베리교구에서의 교황 대리인으로 임명하면서 그는 국가 및 교회의 세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헨리 8세의 결혼에 대한 교황의 무효 승인을 받아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실각했는데, 그의 존재는 일반 민중들이 반 성직자적 감정을 쏟아 붓게 하는데 촉매적인 역할을 하였다.
추기경을 실각시키고 전체 성직자들의 사기를 꺾고자 국왕의 허락 없이는 로마에 항소할 수 없다는 고대 잉글랜드의 사문화되었던 법령-교황존경죄(프라이뮤니레-Praemunire)을 들어 전체 성직자들이 다 어긴 혐의가 있다고 했는데, 성직자들은 침묵속에 이러한 혐의를 받아들였다. 종교회의가 소집되어 스스로 국왕의 허락 없이는 아무런 법령도 제정하지 않기로 결의하고 그는 또한 교황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자신의 재량으로 교황에게 지급하는 성직의 첫수입세을 끊어버리도록 했다.
그 후에 헨리는 다시, 장래 로마와 분열할 때를 대비하여 잉글랜드내의 교회 제도를 재정비했다. 헨리는 잉글랜드에 국교가 성립될 경우 자신의 말에 순종할 만한 인물을 수장직에 임명하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에 토마스 크랜머를 캔터베리 대주교에 임명했다. 교황으로서는 크랜머의 헨리와 캐더린의 결혼 무효 주장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주교직에 임명할 수밖에 없었다. 헨리가 취한 마지막 예비 조치는 성직자들이 로마에 항소할 권한을 금지시키는 권한(항소 제한법)을 의회에서 통과시키고, 로마측의 저주나 금령, 파문에도 불구하고 계속 성례를 집행하겠다는 약속을 성직자들에게서 받아낸 것이었다.
항소 제한법의 통과를 힘입은 크랜머 대주교는 캐더린으로부터의 이혼과 앤과의 결혼의 적법함을 공포하였다. 이에 헨리와 캐더린 사이의 결혼은 무효로 판결되었고 6월에 왕의 사랑을 받던 앤이 합법적인 왕비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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