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의 행정제도와 발전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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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폴란드의 행정제도와 발전전략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6세기경에 지금의 폴란드 북서 지역에 진출하기 시작한 서슬라브인은 10세기경에 폴라니족에 의해 통일된다. 그리고 이들은 966년, 폴라니족 피아스트(Piast) 왕조의 미에슈코 1세(Mieszko I)가 로마 카톨릭을 받아들임으로써 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신성로마제국의영향에서 벗어났다. 1025년 볼레스와프가 왕위에 올라 피아스트 왕조의 기반을 다지며 지금의 폴란드와 유사한 영토를 확보하였다.
1241년과 1259년에 연이어 몽고의 타타르족의 침입을 받아 폴란드 남부 지방이 황폐화되는 등 피아스트 왕국은 1320년 통일될 때까지 외세의 침입에 따른 국권의 수호에 힘을 쏟아야 했다. 14세기 피아스트 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던 카지미르 3세는 문화의 부흥과 개혁에 많은 치적을 남겼는데 크라쿠프, 루블린, 포즈난 등의 도시가 이 때 세워졌다. 2) 야기에워 왕조 (15-16세기 중반)
왕위를 상속할 자식이 없이 카지미르 3세가 죽자 왕위는 헝가리의 야드비가 공주에게 계승되었다. 야드비가 공주는 1386년에 리투아니아의 왕자와 결혼하여 양국은 야기에워(JagieLLo) 왕조로 통합되었다. 이 결혼은 다분히 정략적이었는데, 당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우크라이나에서의 패권을 놓고 경쟁하고 있었으며 한편으로는 독일 기사단의 팽창에 함께 위협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1410년에 폴란드리투아니아우크라이나 연합군은 그룬발트 전투에서 독일의 튜톤 기사단을 물리쳤고 1454년에 시작된 13년 전쟁에서도 승리하여 그들을 완전히 와해시켰다. 이렇게 되자 프로이센은 1525년에 폴란드의 속지가 되었고, 1490년에 카지미르 4세는 헝가리의 왕위까지 겸임하게 되었다.
16세기에 들어 폴란드는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아 문화와 종교사회 전반에 걸쳐 역사적 부흥기를 맞았다. 1543년에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한 저작을 내놓았으며, 종교면에서는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여 교조적인 중세의 종교 행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한편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러시아의 팽창에 대항하여 1569년에 공식적으로 합병하였는데,이로써 폴란드는 남쪽의 흑해에서 북쪽의 발틱 해에 이르는 대국가를 건설하며 최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2.근세 폴란드 1) 선거왕정 시대(16 세기 중반- 18세기)
지그문트 2세가 죽자 야기에워 왕조가가 단절 되었다. 1596년 왕 지그문트 바자는 수도를 바르샤바로 옮겼다. 이 시기에 들어 귀족 계급의 권력화가 이루어져 귀족들의 투표에 의해 왕이 선출되는 등, 왕은 절대 권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러나 몇몇 왕들은 귀족 계급과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국력을 신장시키기에 힘을 쏟았다. 특히 얀 소비에츠키 왕은 투르크 군의 빈 봉쇄를 종식시키고 퇴각시키는 공훈을 세웠다.
1655년 프로이센은 스웨덴과의 전쟁 패배로 폴란드에 대한 세력 확장을 꾀해 왔다. 이러한 국가적 혼란은 왕권의 약화를 가져와 귀족의 동의 없이 왕은 어떠한 권력도 행사할 수 없게 되었고, 1652년에는 귀족 회의에 거부권까지 부여되어 폴란드는 정치 공황기를 맞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경제적 불안과 함께 러시아, 스웨덴, 터키와의 전쟁 등으로 폴란드는 강대국들의 내정 간섭까지 받으며 급격히 쇠퇴해 갔다. 한편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왕은 정치적사회적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로마 카톨릭과 정교회 간의 분쟁으로 야기된 러시아와의 갈등과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개혁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를 이용하여 주변 강대국들은 폴란드의 내정에 적극 개입하였고 마침내 1772년에 폴란드 분할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폴란드 영토의 3분의 1이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에 분할되었다. 2) 폴란드 분할(18-19세기) 18세기 후반 폴란드 귀족 공화국의 약체가 더욱 여실히 노출됨에 따라 폴란드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세 군주들은 폴란드를 나누어 점령하는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1768년 6월 러시아 정교 신도들인 우크라이나 농민들이 폴란드 귀족들에 대해서 무장 폭동을 일으켰다. 동남국경지방 후마인에서 시작된 이 반란은 중부와 동부지역으로 확산되었고 코사크들까지 이에 합세했으며 정교 성직자들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날로 난폭해지면서 수천명의 인명 피해를 내고 결국 러시아-폴란드군에 의해서 유혈 진압되었다. 이 내란중에 폴란드 지주들과 유태인들이 가장 많이 희생되었다. 오스트리아가 1769-1770년에 독일계 주민들이 살고있는 스피스지역과 노비 타르크, 노비 송츠, 스타리 송츠등 폴란드 남부지역을 병합했는데도 이에 대해서 폴란드는 어떤 물리적 대응도 하지 못했다. 이렇게 영토를 점령당해도 무방비상태인 폴란드를 놓고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는 1771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폴란드 분할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1772년 8월 5일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는 폴란드 분할 조약(1차 분할)을 체결하고 곧 이어서 각각 폴란드를 점령했다. 이 조약은 1773년 8월 새로 선출된 의회의 대표단에 의해서 동의를 받았는데 이때는 만장일치제가 적용되지 않고 다수결로 결정되었다. 폴란드 분할은 강대국들이 약소국을 자기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자의적으로 나누어 가지는 고전적인 영토팽창수법의 전례가 되었다. 1791년 5월 3일 유럽최초의 근대적인 성문 헌법인 5.3헌법이 제정되었으나 친러파에 의한 타르코비차 반동의 결과 폐지되었다. 1793년 9월 새로 소집된 의회는 러시아와 프로이센의 무력개입과 분할에 대한 항의대신 침묵속에 폴란드분할 조약(2차 분할)을 비준하고 말았다. 이것으로써 폴란드 개혁 운동은 중단되고 5.3헌법은 실현의 기회를 가지지도 못한채 폐지되고 말았다. 2차 분할후 폴란드는 단지 21만Km²의 영토와 370만의 인구를 가진 소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당시 코시치우스코 봉기는 러시아 지배에 대항한 무장봉기로써 라츠와비체전투에서 승리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795년 폴란드 3차 분할은 폴란드를 유럽 지도에서 사라지게 했고 123년동안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에 분할되어 그들의 지배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