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학 한국 사세도 정치의 성립과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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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교육학 한국 사세도 정치의 성립과 전개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조선 중기의 붕당정치적 질서에는 훈신과 더불어 척신의 정치 참여가 적극적으로 견제되었다. 그러나 노론의 권력 독점이 심화되는 과정에서, 산림세력과 왕실 외척 가문의 결합을 바탕으로 정권이 유지되는 하나의 정치형태가 이루어졌다. 붕당 및 정파사이에 경쟁과 대립이 격화되면서 훈척 세력이 병권을 중심으로 큰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순조 초년까지는 국정에서 훈척의 의미를 중시하는 인식과 함께 훈척의 정치 참여를 경계하는 전통적인 인식도 강하게 존속되고 있었지만, 척신의 공식적인 정치참여가 점점 자연스러운 것으로 굳어져 갔다. 순조헌종철종代에 정권을 장악한 외척은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의 가문, 순조 친모의 아버지인 박준원의 가문, 효명세자의 처가인 趙萬永 가문 등의 핵심 인물들이었다. 순조代 특히 순조 11년의 홍경래의 난 이후로 김조순이 정권을 오로지하고 있었음은 더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사실이다.
19C의 권력자는 비변사를 주도함으로서 일반 국정을 장악하되 대신직에 있는 측근 관료로 하여금 주요 정사를 처리하도록 하였으므로 스스로 전면에 나서서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다만 국가에 특별한 사태가 발생하였을 때에는 공개적으로 정상의 권력을 행사하곤 하였다. 예를 들어 순조 11년에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 그 토벌군 지휘관을 뽑아야 할 때와 같은 경우 김조순은 빠지지 않고 나타나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외척 권력자가 막후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었음은 정국의 중요한 고비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되기도 한다. 순조가 孝明世子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하도록 명령을 내릴 때에 김조순은 이미 왕명에 앞서 특근 관인들을 불러모아 의견을 조정하였다. 또 효명세자가 죽은 후 그 시기에 세력을 모았던 인물들에 대한 공격이 가해질 때 김조순은 세자의 지문을 쓰면서 자기 딸인 왕비의 말을 빌어 자기 세력의 활동을 정당화하고 관인들의 활동을 조종하였다.
(2) 왕권의 약화와 붕당의 퇴조
권력가의 권력 독점은 국왕권의 약화와 짝을 이루었다. 구체적인 정치 운영 전반에서 국왕이 그 관념상의 지위에 상응하는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었음은 순조나 헌종의 국정 주도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는 테서 뚜렷이 드러나는 바이다. 정조의 경우 그러한 노력이 건실한 규모와 체제를 갖춘 장용영의 설치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순조 초년 벽파가 집권함으로써 장용영은 일시에 혁파되었고, 자신의 친위 군병을 강화하려는 순조의 노력은 김조순 가문 인물의 반대에 부딪혀 성과를 거둘 수가 없었다. 또한 헌종철종의 결혼은 당시 수렴청정하고 있던 대왕대비가 결정하였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김조순 가문의 이해관계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순조헌조철조대의 세도정치는 국왕권의 약화라는 현상을 중요한 요소로 하여 성립되었으며, 또 한편으로는 조선 중기 이후 지배계층 내 정치적 대립의 기본적인 범주였던 朋黨의 퇴조를 중요한 요소로 하고 있었다. 남인 등 집권세력에 비판적 의미를 지닌 자신들의 정치적 견해를 임금에게 피력하곤 하였으나, 국왕 중심의 정치질서를 재정립하고자 한 영조나 정조의 노력에도 꺾이지 않았던 노론 핵심 가문 출신 외척의 권력 독점을 막을 수는 없었다. 더구나 당시의 집권세력은 비변사 중심의 국정 운영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자신들 나름대로의 정치질서까지 정립시킨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2) 세도정치의 성격
지금까지 19C 전반의 정치, ‘세도정치’에 대해서는 “외척이 왕권을 누르고 발호했다.”는 형상을 강조하여 그것 자체가 지극히 비정상적인 것이며 그 시기 정치의 부정적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은 19C 末~20C 初, 고종의 처가인 민씨 세력의 발호가 현실의 문제였던 시기에는 어느 정도 현재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었다. 그러나 19C 전반기와 오늘날의 정치논리는 평면적으로 대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19C 외척 가문의 전권을 당시의 관념에 비추어 볼 때 파행적인 것으로만 평가할 수는 없으며, 조선왕조 지배체제가 밟아 온 변화의 귀결로서 차분히 설명되어야 한다. 그것이 많은 폐단을 불러일으키고 국력의 고갈을 가져왔다면, 그것 역시 조선 후기 사회 정치적 변화의 귀결로서, 역사적 생명을 다한 체제의 말기적 현상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1)정치 참여층
세도정치에서의 권력 집중은 여러 사회세력들을 중앙 정치로부터 크게 소외시킨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정조대부터 문과 급제에 대해 분석할 필요가 있다. 정조대부터 철종대에 이르기까지 『國朝文科榜目』을 통해 파악되는 문과급제자의 총수는 2,755명이었다. 급제자들 거주지를 볼 때, 식년시의 경우는 평안도가 26.2%, 경상도가 22.2%, 서울이 18.9%, 충청도가 10.3%의 비율로 나타나지만, 별시의 경우는 서울이 53.1%, 경기도가 12.9%, 경상도가 8.6%, 충청도가 8%로서 서울 일원에 대한 집중도가 매우 높았다. 또한 식년시의 경우라 하더라도 서울 출신들은 상위인 갑과와 을과에 집중되어 있었다.그러한 추세는 도당록 의 운영에도 그대로 나타났다. 정조~철종 연간에 문과급제자 수에 대해 도당록 입록자가 차지하는 비율을 지역별로 따져보면, 서울이 65.9%, 경기도가 27.6%로서 17.4%의 충청도나 15.4%의 경상도에 비교해 확연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이상의 수치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바와 같이, 서울에 사는 유력한 가문출신이라는 조건이 중앙 정치에 참여하기 위한 매우 유리한 요소가 되었던 동시에, 특정세력에 대한 정치 권력의 집중을 구조화시켰다. 세도정치기 정치 권력 담당자의 집중 현상은 그 시기의 당상관들을 분석함으로써 더욱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들이 정2품 이상의 고위직으로 집중되었으며, 관서로 볼 때 권력 집중의 중심은 비변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