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학도가 바라본 세종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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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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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얼마 전 TV에서 유네스코 세종대왕상에 대한 뉴스를 보게 되었다. 유네스코에서는 1989년 이후로 매년 ‘세종대왕상’ (킹 세종 프라이스)를 만들어 해마다 인류의 문맹률을 낮추는데 기여한 단체나 개인에게 이 상을 수여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언어 연구학으로서는 세계 최고인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언어학 대학에서 세계 모든 문자를 독창성, 합리성, 과학성 등으로 순위를 매겨놓아 발표하였는데 놀랍게도 1위는 우리의 한글이 차지하였다고 한다. 위의 사례들은 세계 언어에서 한글이 차지하는 위치가 어디인지를 드러내주며 우리말의 우수성을 널리 보여주는 사례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결국 지난 1997년 10월 1일, 유네스코에서는 우리 나라 훈민정음을 세계 기록 유산으로 지정하기에 이르렀다.
앞서 보았듯이, 한국사에 있어서 가장 빛나는 업적은 훈민정음이라는 문자 창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오늘날 세계 최저의 문맹률 수준인 0%라는 경기적인 기록을 보여주는 것이나 천지인을 과학적으로 사용하여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문자로 알려진 사실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창제 이후 약 4백 년간 나랏글로서 대접을 받지 못했던 훈민정음이었지만 문자생활의 주변부에서 진솔한 감정의 문학적 표현, 한문학습, 한글로 작성된 각종 문서와 전적 등 일상생활의 요구를 만족시키면서 그 사용 계층을 점차로 확장시켜왔다. 이렇게 우리 언어의 고유성과 그것을 표기한 문자체계가 규범으로 자리잡아온 전통에 힘입은 바, 민족의 정체성과 국가로서의 정치적 독자성을 유지 발전시켜 올 수 있었다. 이러한 결과는 창제 당시의 의도를 훌쩍 뛰어넘은 결과로서 오늘날 훈민정음의 위상이 한 층 더 높여 주고 있다. 창제 초기부터 반대파에 의해 존재를 인정받지 못했던 훈민정음.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어떻게 홍보하고 알리어 오늘날의 위치를 만들 수 있었을까? 또한 훈민정음이란 제품은 세계 언어시장에서 어떠한 마케팅적 지위를 가지고 있을까? 이는 오늘날 광고홍보학적 입장에서 살펴볼 때 매우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광고캠페인이 성공적으로 실행되기 위해서는 우선 광고가 소비자의 주목을 끌 만큼 충분히 참신하고 흥미를 유발할 수 있어야 하며 그들에게 충분히 보여질 수 있어야 하며 원하는 타겟층까지 광고가 잘 도달해야 한다. 물론 원칙적으로 제품자체가 뛰어나야지 광고의 효과는 더욱 극대화될 수 있다. 결국 광고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소비자에게 그만큼 흡인력을 가지고 호응도를 불러 일으켜 기억 속에 오래 남게 하는 것이다. 제도가 정착되는 과정 역시 광고와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제도가 정책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일단은 흡인력을 가지고 그 호응도에 따라서 소멸되느냐 아니면 또다시 새로운 정책으로 발전하느냐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주로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 어떠한 정책이 시행됐는가, 그 정책으로 인해 문자 생활은 어떤 양상을 띠며 보급, 전파되었는지 광고와 홍보학적 입장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다만 여기에서는 훈민정음 창제의 목적-애민사상인가, 지배체제의 강화인가-에 대해서는 뒤로 미루고 훈민정음 전파 양상만 광고학적 입장에서 기술하고자 한다.
Ⅱ. 훈민정음의 정책적 보급과 전파 양상
1. 정책적 보급 기관 - 집현전, 언문청, 정음청, 의사청, 간경도감 등
훈민정음을 정책적으로 창제하고 보급하는 과정에는 집현전, 언문청, 정음청, 의사청, 간경도감 등 다양한 기관들이 동원되었다. 마치 한편의 광고가 제작되고 보급되는 과정처럼 완벽한 홍보학적 카테고리와 구성적 틀을 갖추고 있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기관은 집현전이다. 집현전이란 학술 기관의 형태는 중국에서 유래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서부터 이 제도를 실시하였다고 한다. 세종은 집현전을 통하여 조선 초기의 어지러운 정국과 새로운 국가의 규범을 확립하고자 하여 사대부조의 고제, 혼례의 고제, 문무관 고좌의 고제 등 여러 가지 정책을 실행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집현전이 하는 일은 다양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훈민정음 창제였던 것이다.
훈민정음의 보급은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기관으로 보이는 언문청과 정음청, 의사청, 간경도감이 맡았다. 언문청은 세종 28(1446)년 세종이 반대파를 물리치고 훈민정음의 보급, 계몽, 인간(印刊) 등을 위해서 집현전과 개별기관으로 설치되어 국어 저술의 중심 기관으로서의 구실을 하였다고 한다. 정음청은 세종 32년에 설치되어 소학을 인쇄와 정음을 주로 한 왕가의 특별교습 간행기관이었으나 뒤에는 기능이 변하여 갑옷 제조처나 책방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으며 중종 대까지 잔존하였다. 의사청은 세종 26년 를 번역한 기록이 있다. 보통은 집현전에서 찬술제작이 끝나면 주자소에서 판각, 인쇄 되는데, 정음만큼은 반포 전후를 통해 세종이 의사청을 통해 직접 주재하였다. 간경도감은 세조6(1461)년 왕의 호불 성향으로 불경을 간행하기 위하여 설치되었고 성종2(1471)년에 폐지되어 약 11년간 존속하였으나 이 시기는 번역사상 중요할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훈민정음의 기초가 더욱 공고해진 시기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 이들 기관들은 세종 시기에 창제된 훈민정음을 바탕으로 보급을 위해 활발한 저술 활동을 하고 이를 백성들에게 알리는데 주력하였다고 한다. 현대시대에서 광고를 만들고 홍보하는 광고기획사의 역할과 매우 흡사하여 그 당시 이 훈민정음을 알리려고 하는 세종의 홍보정책을 엿볼 수 있었고 그의 뛰어남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되었다.
2. 보급 방책과 문자생활 양상
세종대왕의 두 가지 광고 정책 - 도서 보급과 과거시험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이라는 제품을 소비자인 백성들에게 홍보함에 있어서 도서 출판을 주력으로 하였고 몇몇 과거 시험에 시험과목으로 훈민정음을 넣었다. 아마도 그 당시에는 지금의 TV나 신문 같은 매스미디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장 널리 보급될 수 있는 도서를 미디어로 활용하여 적극적으로 보급한 것으로 보였으며 당시의 유식한 계급이었던 과거 응시생들에게 훈민정음을 공부하게 하여 그들을 통해 보급하고자 한 것이다.
첫 번째로, 세종이 어떻게 도서를 통해 훈민정음을 보급하려 했는지에 대해서는 그 당시 세종시대에 정확히 몇 권의 책이 언문으로 번역되었는지는 찾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일부 남아있는 몇몇 기록 등을 통해 세종이 많은 책들을 훈민정음으로 제작하게 하여 백성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우선 세종5년 세종은 권제, 정인지, 안지 들에게 10권을 언문으로 발행하기를 명하였다. 또한 세종 8년 을 어요첨과 양성지로 하여금 언문으로 만들어 바치게 하였으며 세종 10년에는 대간의 죄를 언문으로 써서 의금부와 승정원에 보이게 하였다. 세종 28년에는 상주사 김구를 불러들여 를 언문으로 번역하게 하였다. 결국 훈민정음을 위한 홍보수단으로서 도서를 가장 잘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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