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이해 원나라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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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의 이해 원나라의 문화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몽골인들은 원래 샤머니즘의 신봉자로서 문자를 갖지 않고, 따라서 문헌(文獻)도 갖지 않아서 그 풍부한 구비전승(口碑傳承)을 기록할 방도를 몰랐다. 그러나 그만큼 다른 고도의 문화를 지닌 민족과 접촉을 하였을 때에는 그 종교·문화·습속에 대해 극히 관대하였고, 오히려 기꺼이 이를 수용하였다. 그들의 문학에 있어서는 위구르 문자나 파스파 문자의 창제로써 그들의 구비문학(口碑文學)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되어 오늘날에도 전하여지는 《원조비사(元朝秘史)》와 같은 일대 걸작품도 나왔고, 중국 고전(古典)을 몽골어로 번역하게도 되었다. 한편 중국에서는 유교가 쿠빌라이칸의 열성적인 장려로 번성하여 특히 주자학이 풍미하였고 이 가운데 화북의 허형(許衡)·유인(劉因), 강남의 오징(吳澄) 등이 특히 유명하였다. 도교(道敎)는, 화북에서는 칭기즈칸으로부터 존경을 받던 장춘진인(長春眞人) 계통의 전진교(全眞敎)가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강남에서는 태일교(太一敎)·정대도교(正大道敎) 등이 이와 맞섰다. 불교는 원나라의 황실, 몽골인 귀족층의 열렬한 비호 아래, 티베트로부터 도래한 라마교가 번영하였고 그 밖에는 특히 선종(禪宗)이 교세를 떨쳤다. 그리스도교는 몽골궁정이나 일부 왕족 사이에서 신앙되어온 네스토리우스파(派)의 그리스도교가 한때 크게 떨쳤으나, 새로이 들어온 로마 가톨릭교의 기세에 눌려 이윽고 그 안에 흡수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와 같이 다채로운 외래종교의 활발한 활동의 그늘에서 백련교(白蓮敎)·두타교(頭陀敎) 등으로 불린 비밀결사적 민간종교가 하층민의 구심점이 되었는데, 이는 이민족(異民族)왕조인 원나라에 대한 민족적 반항심을 불러일으켰다.

이 시대의 회화를 대충 살펴보면 송시대 양식의 계승과 그 반동으로 볼 수 있는 문인화(文人畵)의 발흥이라 할 수 있겠다. 원나라는 광대한 판도(版圖)를 영유하여 동·서의 교통은 활발하게 되었으나, 위정자들이 회화에 마음을 쓸 여유가 없어서인지 화가의 대부분이 송나라를 계승한 한민족(漢民族)의 피를 이었으나, 송나라 때와 같은 화원(畵院) 제도는 설치하지 않았다. 송나라 때의 화풍을 계승한 화가에는 안휘(顔輝)·왕진붕(王振鵬)·손군택(孫君澤)·장원(張遠)·하명원(夏明遠)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안휘는 인물화가로서, 당대 제일로 꼽았으며, 생생하고 괴기(怪奇)에 찬 도석인물(道釋人物)을 잘 그렸고, 채색법(彩色法)에도 새로운 기교를 구사하였다. 손군택을 비롯한 산수화가는 남송(南宋)의 대가(大家)인 마원(馬遠)·하규(夏圭)의 화풍을 본받은 데 불과하여 새로운 맛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송화(宋畵)의 영역에서 탈피하여 독자적인 화풍의 경지를 연 화가로 조자앙(趙子昻)이 있다. 그의 그림 그리기는 여기(餘技)인데, 그럼에도 전문화가에는 없는 자유스러운 경지로 화필을 전개하여 뒤에 가서 문인화(文人畵)가 일어나는 바탕을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다. 문인화가 회화(繪畵)의 양식으로 확립되어 그 화류(畵流)는 중국화 가운데서 커다란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데, 그 모체가 된 것이 원나라의 4대가이다. 그들은 오진(吳鎭)·황공망(黃公望)·예찬(倪瓚)·왕몽(王蒙)의 4명으로, 이들은 거의 같은 시대에 화단에 등단하였고, 출신지는 장쑤[江蘇]·저장[浙江]의 두 성(省)이다. 이들이 작품제작에 몰두한 곳은 모두 둥팅호[洞庭湖] 근처여서 자연 관조(觀照)를 통해 그림을 그렸으므로, 초속고매(超俗高邁)한 정신이 작품 속에 표현되었다. 문인화, 또는 남화(南畵)의 본령(本領)은 이 4대가에 의해 형성되어 후세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밖에 화조화(花鳥畵)를 잘 그린 전선(錢選)이 있다. 그는 사생(寫生)을 중시한 송나라의 원체풍(院體風)과 같이 장식적인 화면의 구성이나 채색을 연구하여 일가(一家)를 이루었고, 그의 화풍은 명(明)나라의 화조화에 계승되었다.

수(隋)·당(唐)의 뒤를 이어 오대(五代)에서 송(宋)·원(元)나라에 이르는 동안 조각은 쇠미(衰徵)의 내리막길만 걸어 특히 원나라 때는 그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떨어졌다. 다만 새로 들어왔던 라마교에서 불교와는 다른 조각작품을 남긴 것이 주목을 받을 정도이다.

이 시대에 있어 서도의 제1인자는 회화에서 언급한 바 있는 조자앙(趙子昻)이다. 그는 송나라의 대가인 소식(蘇軾)·황정견(黃庭堅)·미불(米? 등의 반정통파에 맞서 고서(古書)를 널리 연구해서 복고주의(復古主義)를 제창하였다. 그래서 왕희지(王羲之) 이래의 전통적인 서도의 풍격(風格)을 새로이 살려 한 시대에 획을 그었다.

원나라의 도예는 작품도 적고 문헌자료도 아주 적어서 그 실정을 밝히기는 어렵다. 단지 송나라에 이어져 장시성[江西省]의 징더전요[景德鎭窯], 저장성[浙江省]의 룽취안요[龍泉窯], 허베이성의 치저우요[磁州窯]가 주로 활동을 계속한 듯 한데 적은 유품을 통해서 보더라도 송에서 명으로 옮아가는 과도적인 경향을 엿볼 수 있어 송의 도자기가 지닌 순수한 미는 거의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