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태일 평전》을 들어가며
전태일은 1970년 11월 13일 열악한 노동조건에 항거, 분신자살한 평화시장 재단사 출신의 노동자이다. 전태일은 1964년 17세의 나이로 평화시장 피복공장 미싱사보조로 취직했다. 1969년 재단사들의 친목모임인 '바보회'를 조직하는 한편, 근로기준법을 탐독하면서 평화시
평화시장으로 돌아온 그는 재단사로 일하면서 이전의 바보회를 발전시켜 삼동친목회를 조직한다. 그 뒤 노동실태 설문지를 돌려 126장의 설문지를 받아 내고, 90명의 서명을 받아 노동청에 진정서를 제출한다. 이 내용이 《경향신문》에 실리면서 삼동회 회원들은 본격적으로 평화시장근로개선 작업에
기준법’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진 전태일은 동료 재단사들의 모임을 추진하여 ‘바보회’의 회장이 된다. 바보회 활동을 하던 중 평화시장에 소문이 퍼지고, 전태일은 위험분자로 낙인이 찍혀 직장에서 해고된 후 다시 동일업종으로 취직하지 못하게 되었다. 1년
년 19세, 한미사 재단사가 됨. 근로자들의 근로조건을 밝힌 ‘근로기준법’이 있음을 알게 됨.
바보회전태일이 1968년에 만든 노동운동단체로, 이듬해에 전태일이 재단사들의 모임인 ‘바보회 창립총회’를 주최하고 회장에 선출되었다. 바보회라는 이름에는 노동자들이 바보처럼 자본가들에게 착
노동청에 탄원서를 내고 신문에 평화시장의 근로 환경과 노동자들의 생활을 기고하는 등의 활동을 펼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도 사용주들을 변화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데모까지 계획한 전태일은 데모당일인 11월 13일 자신의 몸을 불 싸지르고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
경제 성장...허나 그것은 노동자의 뜨거운 피와 땀으로 인해 가능했다.
전태일이 태어나기 전 그리고 태어나서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나라의 시대상황은 1960~70년 이승만의 정권의 물러남과 동시에 박정희가 나라의 정권을 잡음으로써 놀라운 경제성장을 보여주었다.
경공업을 중심으로 섬유와 같은
평화시장의 문제를 해결해준다는 약속을 받아냈으나 이 또한 지켜지지 않았다. 삼동친목회가 중심이 되어 11월 13일 평화시장에서 데모를 하기로 계획하였으며 이날 근로기준법을 화형에 처하기로 하였다. 11월 12일 아침, 전태일은 마지막으로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한 후 집을 나섰으며, 그날 저녁 친구
전태일 사건을 논하기 위해서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전태일 사건 자체가 군정의 특징에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의 정당성은 논외로 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군사정권의 특성을 전태일 분신사건과 연계하여 다룸으로서 군사정권의 특성이 노동자계급에 어떻게 영향을 미
평화시장 내 재단사 모임인 ‘바보회’조직
1970년 10월 8일, 삼동회 대표들이 (주)평화시장 사무실에 찾아가 다락방 철폐, 노조결성 지원 등 8개항의 요구를 제출함
1970년 10월 24일, 근로조건 개선 시위를 기도했으나 실패
1970년 11월13일, 오후 1시 30분경 평화시강 앞길에서 ‘근로기준법 화형
. 전태일 분신자살 사건이란?
1970년 11월 13일 서울 동대문의 평화시장 앞에서는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를 바꾼 사건이 일어났다. 평화시장 피복공장의 재단사이자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던 22살의 전태일이 온 몸에 휘발유를 붓고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고 외치며 평화시장 앞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