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태일분신자살 사건이란?
1970년 11월 13일 서울 동대문의 평화시장 앞에서는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를 바꾼 사건이 일어났다. 평화시장 피복공장의 재단사이자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던 22살의 전태일이 온 몸에 휘발유를 붓고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고 외치며 평화시장 앞을
시장 상인들의 항의도 잇따랐다. 학생과 지식인들의 저항도 거셌다. 1971년 대학생에 대한 교련교육 실시 방침에 반발하여 전국의 대학생들이 시위에 나섰다. 1971년 4월 동아일보를 비롯한 전국 14개 언론기관에서 언론자유수호운동이 일어났고, 8월에는 대학 교수들이 대학자주화운동을 선언했다. 1971년
운동기지화의 핵심 거점인 노령 연해주 지역에서의 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864년 이후 형성되기 시작한 노령 연해주의 한인사회는 1910년의 ‘합방’까지 20여만 명을 헤아렸다. 이들은 황무지 개척과 러시아의 시베리아 개발추진에 노동력을 제공하면서 생활터전을 닦고 한인사회를 이룩했다. 이
노동운동의 필요성을 느낀 노동자들은 70년 전반기에 들어서면서 많은 민주노조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후반기에는 이러한 민주노조들이 성장하면서 박 정권의 심한 탄압 속에서도 노동자들의 권익향상을 위해 치열한 투쟁을 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태일의 분신자살 이후로 우리나라 노동현실
노동자들의 삶은 아주 힘들고 궁핍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랬기에 전태일의 분신사건과 같은 노동자 계급의 투쟁이 잇달아 일어났다. 하지만 이러한 노동자 계급의 투쟁을 우리는 단편적으로만 바라본 것이 사실이다. 지금까지의 노동 연구의 중심은 노동시장, 노동쟁의, 노동조합, 노사관계와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