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소속의 후보자가 경함하는 사태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로써 사회대중당은 123개 선거구, 한국사회당은 17개 선거구, 혁신동지총연맹은 무소속으로 13개 선거구에 후보자를 등록하였다. 따라서 혁신정치세력이 서로 경합하는 선거구가 24개에 이르게 되었다. 이런 후보자의 난립상태를 조정하기 위해
혁신정당의 실패를 가져온 시대 상황적 요인으로서는 국제적 냉전체제를 들 수 있습니다. 남북한에 분할 진주한 미소 양군은 기본적으로 각기 자국의 국가이익에 초점을 맞춤 대한정책(對韓政策)을 수행하였고 자국에 우호적이고 협조적인 정부 수립을 이루기 위해 그들의 노력을 쏟아 부었습니다. 이
정당이 될수 있다는 주장이었고, 그의 참여를 반대하는 조병옥ㆍ김준연ㆍ장면은 조봉암의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반대파에 대해 조봉암은 〈신당운동에 호응할 터〉라는 제목의 성명을 1955년 2월 24일 발표하는데, 이것은 민국당 김성수가 조병옥, 김준연을 무마하기 위해 조봉암에
(2) 광복 이후의 정당사
이 후, 제1공화국 시대를 지나 제2공화국헌법에서는 <정당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 단 정당의 목적이나 활동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될 때에는 정부가 대통령의 승인을 얻어 소추하고 헌법재판소가 판결로써 그 정당의 해산을 명한다>라고
. 그러나 우리 시대에 그런 혁신세력이 존재했다는 점과 그런 정당이 법살(法殺)당했던 반역사적인 사실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진정한 진보세력이 다시 돌아오기까지 50여년의 세월이나 겪었어야만 했다는 것은 우리 정치사에 있어 다양한 모색과 고민의 계기가 되는 사안임에는 분명할 것이다.